보이는 것만이 실체가 아니다

얼굴을 알고 지낸 지 십여 년이 훌쩍 넘었다.

하지만 반가이 손을 잡거나 안은 적은 없었다.

항상 행사의 뒷풀이였거나 문득 들어선 카페에서 마주쳤을 뿐이다.

다음 김창덕 작가. ⓒ포털 다음 인물사진
다음 김창덕 작가. ⓒ포털 다음 인물사진

그러나 다음(茶愔) 선생이 윤회매를 제작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전시 또한 빠지지 않고 보았다.

호사스러워 보였다.

한 잔의 차를 마시기 위해 꾸리는 찻 자리가 그랬고, 그 찻자리의 벗이라니.

세상은 부조리와 불협화음으로 삐그덕 마찰음을 내는데 한가로이 윤회매와 벗하며 차를 마시다니.

그래서 우리의 손에는 늘 머신을 통과한 패스트 커피가 들려 있었고 앞으로만 달렸다.


때가 되면 만난다

벌이 꽃가루를 채집해 꿀을 만들면서 생긴 밀랍으로 만들어진다.

밀랍에 75도의 열을 가해 매화꽃이 비로소 피어난다.

이 모든 게 돌고 도는 불교의 윤회와 흡사해 윤회매(輪廻梅)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윤회매는 밀랍과 노루 털, 매화 나뭇가지, 석채(石彩), 돌가루, 자연 색소 등 천연 재료들을 사용한다.

꽃술은 노루 털을 사용하고 옻칠을 해서 황을 묻힌다.

매화 잎과 꽃술, 꽃받침 등을 밀랍 땜질로 나뭇가지에 붙이면 작품이 완성된다.

김창덕 작가- 윤회도자화. 60×40cm 석채. ⓒ광주아트가이드
김창덕 작가- 윤회도자화. 60×40cm 석채. ⓒ광주아트가이드

다음 선생은 “여기까지 오는데 수만 번의 시행착오가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매체의 실험을 통해 구축된 독자적인 조형 양식을 만들어냈고 붉고 푸른 꽃잎과 꽃받침이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나뭇가지들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느낌을 만들어낸다.”고 자신의 작업에 관한 설명을 해준다.

윤회매의 처음 제작 년 도는 멀리 조선 시대까지 올라간다.

정조 때 실학자로 규장각 검서관과 적성(경기도 파주)현감을 지낸 청장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찻자리에 놓고 감상하는 밀랍이 시작으로 이때 만든 매화가 기록에 남아있다.

이덕무는 차를 좋아하는 다인(茶人)으로 품격있는 매화를 밀랍으로 17세 때 만들었다.

봄에 잠시 피고 지는 아쉬움이 배어나 윤회매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다음 선생은 “생화가 살아있는 나무 위에 피었을 때 그것이 꿀과 밀랍이 될 줄 어떻게 알았겠으며 꿀과 밀랍이 벌집 속에 있을 때 그것이 윤회매가 될 줄 알았겠는가. 그렇기에 매화는 밀랍을 망각하고 밀랍은 꿀을 망각하고 꿀은 꽃을 망각한다.” 며 “하지만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밀랍이 되고 꽃이 되는 윤회를 거듭하며 윤회매(輪廻梅)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고 설명한다.


다시 피어나는 윤회도자화(輪廻陶瓷畵)

ⓒ광주인
ⓒ광주인

밀랍의 윤회매는 다시 도자화로 거듭난다.

보관과 운반의 편리성은 오랫동안 고민이었다.

평면으로 제작된 윤회매는 돌가루로 만들어진 도자에 꽂히면서 입체로 새로워졌다.

다음 선생은 “새로운 창작 과정은 ‘무엇’과 ‘어떤 것’의 만남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부딪힘이다. 부조화가 조화로움으로 변화는 작업에 있어서 무한의 빛일 것이고, 반복되고 힘겨운 노동의 시간은 내 안에 있는 나와 새로운 만남일 것이다. 결국은 나의 이야기인데 내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고 이야기한다.

‘차(茶)’란 한자는 풀초(艸) 자와 나무목(木) 자, 사람인(人) 자가 합해진 것이다.

차는 마신다고 말하지만 마시는 것에만 있지 않다.

마시기 전에 차나무가 생장하기 위해서는 햇빛, 땅의 기운, 비, 자연의 조화로운 결정이 필요하다.

차를 통해 풀과 나무 사이에 사람이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차를 벗하며 자연과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윤회매와 윤회도자화의 궁극이 될 것이다.

다음 선생은 “보이는 것이 실체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실체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의 작업 과정에서 '어떻게 격이 있게 비울 것인가'가 화두였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다. 스스로를 벗하며, 오로지 작업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는 말을 남겼다.

ⓒ광주인
ⓒ광주인
ⓒ광주인
ⓒ광주인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 매화.

추운 겨울에 눈부신 꽃망울을 터뜨리기에 옛 선인들은 매화를 ‘은일과 지조’의 상징으로 여기며 각별하게 애호했다.

매화시를 짓는가 하면, 밀랍으로 조화를 만들어 즐기기도 했다.

이제 그 꽃을 맞이할 때가 되었다.

다음 선생은 윤회도자화로 대한명인이 되었다.

/윤회매 문화관: (062)375-3397, 광주 남구 양림동 199(지번). 

**윗 글은 월간 <광주아트가이드> 171호(2024년 2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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