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톡톡] 다같이 슬퍼하자, 당신의 사월을.
[영화 톡톡] 다같이 슬퍼하자, 당신의 사월을.
  • 윤여리 시민기자
  • 승인 2021.04.17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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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일상이 되었다. 어떻게 울어야 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당신의 사월 영화 포스터 ⓒ (주)시네마달
'당신의 사월' 영화 포스터 ⓒ (주)시네마달

'지겹다. 그만 좀 우려 먹어라', '해도해도 너무한다. 정도껏 하자'

<당신의 사월> 네이버 영화평점란에 나오는 멘트들이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이 평점 테러 수준의 별점을 주고 있는 이유는 이 영화가 세월호라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평은 영화에 등장하는 박철우씨와 아내가 탔던 택시기사의 반응과 연장선상에 있다. 부부가 탄 택시를 운전하던 기사가 광화문을 지나면서 했던 “지겹다”는 그 말.

'당신의 사월' 박철우 출연자 ⓒ (주)시네마달
박철우 출연자 ⓒ (주)시네마달

그들은 왜 이 지겨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 정도로 우려먹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냐고 비아냥거린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이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고를 끄집어내는 것인가?

세월호 사건을 외면하고 싶은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불편한 감정을 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그 느낌은 세월호 사건이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비극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내 앞에 있는 대상으로서 세상을 마주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내 인식의 활동을 통해 객관적인 대상이 된다. 어떤 것이 실재하는 것이 되려면 나의 인식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렇게 자아의 인식활동을 통해 나는 세계를 근거짓는 주체가 되며, 주체는 인식 활동 속에서 세상 만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데 어느날 도무지 나의 인식능력으로 포착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 등장한다. 모든 것을 소유했던 자아는 그 미지의 것도 담아내려 하지만 그것은 내 인식의 틀을 찢고 나온다. 이 찢김의 고통이 세월호 앞에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일 것이다.

ⓒ (주)시네마달
ⓒ (주)시네마달

도저히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 사건 앞에서 나는 더이상 주체로 기능할 수 없다. 주체는 무기력한 수동성의 나락으로 떨어져 보잘 것 없는 지위로 강등된다.

이전까지의 주체는 세계의 대상들을 향유하고 소비하는 평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주체가 향유하거나 소비할 수 없는 것이 출현해서 지금까지의 일상을 뒤흔든다.

<당신의 사월>에 붙은 악평은 이 불편함을 견딜 수 없는 주체의 불만일 것이다.

그러나 대상들로만 이루어진 세계 속 평화는 허상에 불과하다. 자아는 자신과 마주치는 모든 대상을 자기 속으로 포섭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시달린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가 확대되고 커질수록, 비대해진 자아의 세계에서 우리는 비틀리고 짓눌린다.

“과잉주체가 느끼는 억울함은 여기서 나온다 (…) 이 사회는 ‘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넌 뭐든지 가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이 과잉주체의 기원은 “주체의 욕심보다는 대상의 배신에, 주체성의 결핍보다는 대상성의 결핍에 먼저 있는 것이다.”(김곡, <과잉주체>)

영화에는 세월호특별법을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조롱하는 폭식투쟁이 등장한다. 슬퍼하는 자 옆에서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자들. 죽어가는 이웃들 옆에서 홀로 벌이는 잔치.

일간베스트 회원들의 폭식투쟁 ⓒ머니투데이
ⓒ 머니투데이

이러한 폭식-자아에게 유일한 타자는 오직 죽음뿐이다. 그가 통제하거나 계획할 수 없는 죽음만이 그에게 허락된 ‘타자’이다. 홀로 군림하는 존재의 철옹성 속에서 외롭게 막을 내리는 주체의 삶.

이 홀로-주체의 감옥을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는 각자의 ‘존재’를 넘어서야 한다. “탈출은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사슬,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이 사슬의 결박을 깨트릴 것을 요구한다.”(엠마누엘 레비나스, <탈출에 관하여>)

그러나 자아에게는 스스로를 구출할 능력이 없다. 내 존재를 탈출해 나와 다르게 되는 길, 그 길은 오로지 다른 곳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이옥영 출연자 ⓒ (주)시네마달
이옥영 출연자 ⓒ (주)시네마달

이는 주현숙 감독이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의문인 “자기 일도 아닌데 왜 사람들은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것일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우리는 날카롭게 나를 찢는 상처를 통해서 자신을 벗어나 타인을 만나고, 자신에게만 과몰입하는 고독에서 탈출할 수 있다. 광화문의 촛불은 ‘나’라는 개별성을 넘는 데 성공한 자아가 낯선 타자들을 만나 보편으로 연결되는 경험이었다.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 질서의 회복과 개별 피해자의 치유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여러 날을 바다 속을 떠돌다 닻줄에 걸린 지성이는 얼굴이 사라졌다. 얼굴 없는 지성이를 끌어올린 이옥영씨의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사월' 문종택 출연자 ⓒ (주)시네마달
문종택 출연자 ⓒ (주)시네마달

문종택씨는 연신 흐느끼면서도 지성이의 영정사진이 내려지는 모습을 끝까지 카메라에 담는다. 전달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전달해야만 하는 이룰 수 없는 사명을 위해 그는 카메라를 놓을 수 없다.

“문종택 씨의 ‘울음’을 기록하고, 사라진 지성이의 얼굴에 표정을 부여하고, 그럼으로써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금의 사건을 기억해내는 언어를 고안하는 것”(김형중, <후르비네크의 혀>). 그것은 도달 불가능한 지점이다.

그러나 그 불가능은 실패 속에서 가까워지는 지점이다. 우리는 끝내 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실패를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 불가능한 목적이야말로 우리가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준다.

ⓒ (주)시네마달
ⓒ (주)시네마달

“아이들을 구하라”(루쉰, <광인일기>)

모두가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는 사회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어야 하는 게임에 강제로 투입된다. 경쟁자와 싸워 살아남아야 하고, 나보다 약한 존재를 잡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하는 세계, 오직 자기보존만이 목적인 ‘만인 대 만인’의 투쟁만이 계속되는 세계. 과연 이런 세계가 정말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계인가?

그러니 이제는 지겹다는 말 대신 애도하고 슬퍼하자. 더이상은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내가 먼저 다른 이를 잡아먹는 식인이 되지 말자. 오늘의 나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나와 미래의 아이들을 구하는 길이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보는 대신 누군가의 아들과 딸, 어머니와 아버지인 이웃으로, 함께 먹고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그렇다면 어떤 고난에 처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같이 이겨내야 할 일이 되며, 연대의 경험은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의 문 앞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임무는 그 문을 통해 보이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일상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레베카 솔닛, <이 폐허를 응시하라>)

ⓒ (주)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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