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이야기>

  부여(扶餘)는 소부리(所夫里:일명 사비)라 불렸으며, 538년(성왕 16) 웅진(熊津:현재의 公州)으로부터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국이 멸망하면서 신라에 예속되어 672년(문무왕 12) 부여도독부가 설치되었고, 751년(경덕왕 10)에 이르러 부여현(扶餘縣)으로 개칭되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이곳 부여의 관북리는 백제 사비도읍기(A.D. 538~660년)의 왕궁지 및 중심관아지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곳이다. 지난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발굴조사 되었으며, 이후 2001년부터 발굴이 재개되어 계속되고 있다.

 부여 관북리 백제유적은 사비도읍기의 왕궁지 및 중심관아가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동안의 조사에서는 백제시대의 장방형 연지(蓮池) 및 대규모 공방유구(工房遺構), 와적기단건물지(瓦積基壇建物址)와 도로, 석축, 지하목곽창고(地下木槨倉庫) 등 수십기에 이르는 다양한 백제시대의 생활유구들이 확인되었으며, 목간, 연화문와당, 각종 토기 및 자기류 등 1,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2003년 가을 첫번째로 발견되기 시작한 백제시대의 지하목곽창고(地下木槨倉庫)는 2004년 가을까지 3기가 추가로 확인되었으며, 석곽창고 1기도 발견되었다. 2004년 12월에 보존과 복원을 위하여 발굴, 수습된 첫번째의 지하목곽창고는 직사각형으로 흙을 파낸 후 안에 길이 4.5m, 너비 1.8m, 깊이 1.5m 정도의 목곽을 짜 넣은 것으로, 궁궐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참외, 복숭아, 머루 등의 씨앗도 함께 발견됐다.

 과일씨앗의 출토상태로 보아 목곽창고에 상당량의 과일이 보관됐던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이 과일들은 백제시대 왕실의 주요 행사나 제례 때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을 주관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측은 "치밀하게 조립된 목곽의 구조로 보아 백제시대 규격화된 저온창고 즉, 오늘날의 냉장고와 같은 기능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며, "이들 창고시설의 발견으로 관북리 백제유적이 왕궁터였을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고 밝혔다.  

 나머지 창고의 경우도 구체 용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치밀하게 조립된 구조 등으로 보아 백제시대 규격화된 저온창고(低溫倉庫), 즉 오늘날의 냉장고와 같은 기능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연구소측은 "이들 창고시설의 발견으로 관북리백제유적이 왕궁지(王宮址)였 을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국토의 개발에 따른 지하유적의 발굴이 산록이나 구릉지에서부터 평지와 저습지에까지 확장되면서, 전국적으로 곳곳에서 목조문화재가 발견되고 있으며, 그 종류도 도구나 그릇, 공예품 등의 단일물에서부터 수리시설이나 우물, 또는 곡물이나 과일저장고 등의 대형 구조물에 까지 확대되고 있다.

 또한 그 시대도 고려, 삼국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불어 목재의 외형적, 미시적 구조, 목재의 물리적, 기계적 특성 등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목조유물 보존을 전문으로 하는 문화재보존과학자들의 발길과 손길도 분주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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