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① 지리산에 깃든 사람들

'지나온 길 되돌아보며 뉘우침으로 가려네'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 가 주― 꽃피는 봄입니다. 연락 사항 남겨주세요. 안녕."  날 것 그대로인 노래가 전화선을 타고 달려와 무심히 살아온 나의 일상을 화들짝 겨울잠에서 깨운다.

벌써 매화가 피기 시작했으니 어서 달려오라는 채근만 같다. 경남 하동 악양면으로 박남준 시인을 찾아가는 날은 날씨까지 덤으로 반겨주어서인지 내 몸 사방에서 꽃망울이 불쑥불쑥 솟구칠 것만 같은 오후였다. 매화꽃은 예년보다 빨리 피고 있었다.

전라북도 모악산에서 기거하던 박남준 시인이 지리산 자락으로 둥지를 튼 것은 2003년 늦봄이었다. 모악산 숲속에서 기거하며 풀꽃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어 시를 먹고살던 터였다.

   
  ▲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악양산방'에서 시인 박남준을 만났다. ⓒ고영서  

그에게 집이었던 숲은 울창해질수록 햇살이 들지 않아 춥고 습했다. 빨래를 해 널면 며칠씩 마르지 않아 곰팡내가 나고 흙벽이 비에 젖듯 죽죽 젖어 내리는 날엔 온몸에서 스멀스멀 무언가 기어다니는 듯하였다.

엄살이라도 부리라는 듯 몸 여기저기가 아파 오자, 그는 습한 집 상태를 주위 몇 사람에게 말하고는 이내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법원에서 전화가 왔다. 죄 지은 것도 없지만 법원이란 말에 움찔 하고 있는데 전화선 저쪽에서 등기권리증을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후배의 전화를 받고서야 내용을 알아차렸다. 후배는 악양 집을 급히 팔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몇 사람이 그 집을 박 남준 시인에게 사 주자고 입을 모았고, 그런 사실을 그에게 말하면 필시 거절할 거라는 걸 알고는 미리 사 놓은 후 연락하였다. 그러고도 일 년을 비워두었는데, 모악산방의 숲이 갈수록 우거지자 떠밀리듯 악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 "집 한 칸 갖지 않고 살겠다...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릴까"  

그는 거창하게 무소유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이름으로 땅이나 집 한 칸 갖지 않고 살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은 책임져야 할 일들이 뒤따라 마음의 자유를 잃어버릴까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 태생지인 법성포에서 자랐던 시인이 바다보다 숲을 좋아한 건 왜일까. 바다의 갯내, 뻘내, 생선 썩는 냄새는 포근하고 편안하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권태로워진다. 그러나 숲속에서 나무와 함께 있으면 며칠이 지나도 편안하다는 것이다.

"지친 새들의 쉴 곳이 되어주고 그 가지에 집을 틀거나 몸을 내주어 구멍 속에 둥지를 짓게 해주는 나무를, 누군가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나무를 생각한다/(중략) 내 정신 속에 깃든 나무를, 마음속에 일어나 수없이 쓰러지고 일어서던 나무를, 그 사랑에 휩싸인 날들을 더듬는다/내 안에 갇혀 있던 모든 나무들이 일어나 첼로의 낮은 현을 긋는 울음소리를 향해 비로소 눈을 뜨고 걷는"(「내 안에 있는 나무」) 시인의 노래에 빠져들다 보면 나무와 시인의 각별한 호흡이 가슴에 뭉클 와 닿는다.

"결국 남쪽 악양 방면으로 길을 꺾었다/하루 종일 해가 들었다/밥을 짓고 국 끓이며/어쩌다 생선 한 토막의 비린내를 구웠으나/밥상머리 맞은 편/내 뼈를 발라 살점을 얹어줄 사람의/늘 비어 있던 자리는 달라지지 않았다."(「이사, 악양」)고 노래할 수 있을 만큼 시인의 삶은 지리산 자락에 둥지를 튼 후 훨씬 밝아졌다.

하루 두 번 빨래를 해 널어도 될 만큼 풍족한 햇살에 취해 시인의 주방 겸 손님 접견실에 앉아 매화차를 마시며 방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요즘엔 흔히 볼 수 없는 광목에 황톳물을 먹인 방 자리가 장판 대용으로 깔려 있었다.

벽 역시 손수 황톳물을 입힌 그의 솜씨에 탄성을 지르자 그는 “생각보다 황톳물 들이기란 쉽다”며 겸손해 한다. 그렇듯 여기저기 그가 흙에 가까워지려 한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앞마당에는 모악산에서 같이 이사 온 복수초, 노루귀, 깽깽이풀, 흰 용담, 수선화, 초롱꽃, 금당화, 백련 등이 화단을 이루며 그의 말벗이 되어 준다. 벌써 꽃을 피운 놈들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바삐 드나드는 벌들의 집을 청소해주면서 그의 마음도 환해진다.


   
  ▲ '지상의 뭇 생명을 품어 깨어나게' 하려는 박 시인의 마음이 배어 있다. ⓒ줌뉴스  

마당에 서서 지리산 남부 능선을 바라보면 산을 타고 내려오는 계단식 밭과 논들과 마을이 정겹게 눈길을 사로잡는다. 앞집 굴뚝에서는 귀소 본능을 자극하며 모락모락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마루 한켠 바구니에는 예쁘게 깎인 곶감들이 종일 햇살에 달콤한 입맛으로 누워 있고, 마당 한켠 텃밭에는 부추, 시금치, 배추, 상추, 대파, 아욱이 봄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최소한의 것으로 최대의 삶을 누리는 모습을 보며, 풍요 속에서도 도무지 만족 할 수 없어서 조급하고 피곤하기만 한 도시의 삶이 부끄럽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앞으로도 가정을 꾸릴 의향이 없냐는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아마도 글에 대한 열정이 혼자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섯 권의 시집에다 산문집이 아홉 편이나 된다. 지금도 산문집 집필 때문에 시간내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 와중에도 기동성을 가지기 위해서 이원규 시인에게 오토바이 타는 법을 배워 이젠 제법 스쿠터를 타고 지리산 마을 곳곳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그래서 스쿠터와 함께 이 봄, 바람나고 싶단다.

고운 얼굴과 맑은 눈을 가진 박남준 시인에게도 나이는 비켜갈 수 없나보다. 머리가 희끗희끗 해진 것이 언뜻 반백의 나이를 엿보게 한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혈안이 된 각박한 세상에 그를 아는 사람들이면 한결 같이 그를 식구처럼 챙겨주느라고 바쁘니 그는 분명 복 받은 사람이다.

감쪽같이 집을 구해주는가 하면, 내가 만나고 있는 사이에도 누군가 전화를 걸어 택배로 먹을거리를 붙인다며 주소를 묻는다. 조금 더 나누고 남보다 조금 덜 가지려고 하면 이렇게 풍족한 삶이 되는 걸까.

끝으로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 한 편을 가만히 외워본다. "콩 한 톨, 쌀 한줌 같이 나누려는/그 함께 하려는 마음을 탁발하려는 것이네/지상의 뭇 생명을 품어 깨어나게 하는/오 어머니, 대지의 너른 품안을 탁발하려는 것이네//김나는 밥 한 그릇, 따뜻한 잠자리를 탁발하려는 것이 아니네/문전박대와 유랑 걸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지나온 길 되돌아보며 뉘우침으로 가려네"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

2007-03-0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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