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예술

비투스 성당에서 바라본 체스키 크룸로프 풍경.  ⓒ차노휘


새벽, 휴게실에서 작업하는 나는 본의 아니게 관음증 환자가 된다. 소리에 민감해서일까, 아니면 벽이 얇아서일까. 블루투스 이어폰 배터리가 거의 방전되어 충전하는 동안, 아니면 조금 쉬려고 기지개를 켤 때, 뜻하지 않은 소음을 듣곤 한다.

오늘은 이곳에서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니 한번 즈음 들을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던 소리였다. 그것은 바로, 여성의 교성이었다.

새벽에 난데없이 신음하듯 끼어드는 그것. 처음에는 내가 생각한 것이 맞나, 라는 호기심에 소리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처음보다는 분명치 않지만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이제야 찾았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이어폰을 꼈다.

이곳에서 ‘사랑’이 없을 수는 없다. 여성 전용 숙박업소가 아니다. 대부분 혼자 오는 사람들이지만 커플도 있다. 여행지에서의 데이트는 당연한 것이다. 새벽, 구겨진 몸을 펴기 위해 창문 밖을 내려다보면 귀여운 커플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술집들이 문 닫는 시간에 귀가하는 그들. 여행객인지 거주자인지 구별할 수 없지만 그들의 귀엽고 익살스러운 행동이 가로등 아래 펼쳐진다. 한껏 등을 구부려 파트너 앞에서 춤을 추고 그 춤에 맞춰 파트너 또한 몸을 흔들어 댄다. 그리고는 환한 키스로 마무리한다. 사랑의 유희는 나이를 초월한다. 바츨라프 광장에서도 카렐교에서도 구도심지에서도 다양한 연령의 ‘쌩쌩’한 사랑의 유희를 종종 접한다.

어제는 바츨라프 광장 근처에서 빵을 사들고 나왔다. 전철이 있는 지하 빵집이었다.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두 눈에 들어온 것은 화려한 옷가게 쇼윈도 앞에서 키스를 하는 남녀였다. 상점 앞이 대로라, 자동차와 트램 및 행인들이 수없이 지나다녔다.

아랑곳없이 서로에게 집중한다는 것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어설퍼보였다. 그 집중이 초등학생들이 받아쓰기 보듯 서툰 것을 잘 해내려고 애쓸 때처럼 보여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내가 지나치기 전에 서로 떨어져서 웃었다. 여자가 혀를 내밀고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가 여자 혀를 깨문 모양이었다. 남자는 연속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체스키 크룸로프 풍경. ⓒ차노휘


이곳에서는 사랑의 제스처도 일상이다. 지나가는 사람도, 사랑을 나누는 당사자들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풍경의 한 부분처럼 녹아든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전수연의 피아노 연주곡 ‘사랑’처럼 감미로운 음악과 같다.

감성적인 사랑의 흥을 깨기는 싫지만 진화론 입장에서 보면 예술의 기원은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출발했다고 말한다(제프리 밀러). 좋은 유전자를 퍼트리려는 본능, 성 선택설에 근접한 이론이랄까.

그러다가 좀 더 확장시킨다. 조상이나 죽음, 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과 가까워지려는 몸부림의 표현이라고. 나는 여러 가지 기원설 중에서 무목적성의 목적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칸트). 어떤 계획이나 목적 없이 ‘그냥’ 끌리는 것.

이해관계 없는 작업. 그 자체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것. 모든 행위가 목적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설령 목적을 가지고 다가왔다 하더라도 사랑은 그것을 ‘무’로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원시의 순수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행복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비극적인 사랑도 많다. 비극적인 사랑은 희생이 전제된다. 그래서 그 사랑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함박눈에 덮인 체스키 크룸로프 마을. 언뜻 언뜻 몇집 정도만 주황색 지붕이 보일뿐 마을 전체가 온통 흰 눈으로 덮여 평소와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차노휘


프라하에서 버스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체스키 크롬로프에 전날 다녀왔다. 중세도시를 그대로 보존해서 흡사 동화 속 왕자와 공주들이 살 것처럼 여전히 예쁘다. 1992년에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의 역사는 13세기 초 브이텍 가문에서 시작된다. 진취적이지 않았던 브이텍은 당시 최고 귀족가문인 로즌 베르크가 마을을 탐내자 돈을 받고 양도한다. 로즌 베르크는 영주의 성을 고딕으로, 실내 내부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바꾼다. 사실상 지금의 모습은 로즌 베르크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로즌 베르크 가문은 300년 뒤 대가 끊겨 그의 가까운 친척인 에겐 베르크가 마을을 물려받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최고 권력자인 왕이 마을을 탐낸다. 왕에게는 병든 아들이 있었다. 병을 앓고 있는 왕자에게 크룸로프가 최고의 휴양지라고 그는 생각했다.

에겐 베르크에게 마을을 빼앗아버린다. 그가 바로 병약하고 인심을 잃은 왕, 그리하여 30년 종교 전쟁(1618~48)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루돌프 2세(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 1576~1612)이다. 이렇게 하여 그의 병든 아들이 시골 마을에 머무르게 되면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시작된다.
 

 체스키 크룸로프 한 가운데를 흐르는 블타바 강과 강변 마을. ⓒ차노휘


비극은 1608년에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남자가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그는 왕자의 아내를 죽인 살인자였다. 왕자의 아내는 살인자의 딸이었다.

자신의 딸을 죽인 그는 체스키 크룸로프, 라트란 거리에 사는 이발사였다. 라트란은 귀족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발소 바로 옆에 목조다리가 있고 그 다리가 서민과 귀족들의 경계가 되었다. 다리 근처에는 주로 귀족들을 시중드는 사람들이 살았고 그 거리 1번지가 이발소였다.

이발사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한 명 있었다. 딸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곳에 고귀한 신분의 청년이 휴양하러 프라하에서 왔다. 누군가는 그가 몹쓸 병에 걸렸는데 그의 부모가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일부러 시골 마을로 보냈다고 했다. 많은 소문이 돌았지만 이발사는 조용하고 겸손하기까지 한 그 청년을 좋아했다. 자신의 딸이 그 청년을 흠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는 딸만큼이나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늘의 뜻이었을까, 딸과 청년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부가 침대에서 목이 졸린 채 숨졌다. 범인을 알 수 없었다. 청년은 아내가 죽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범인을 잡는다면서 마을 사람들을 불러 고문을 했다. 몇 사람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청년은 범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마을 사람들 전부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때 이발사가 나섰다. 내가 딸을 죽였노라고 고백했다. 청년은 그를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켜야 했다. 이발사는 처형당했고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은 희생당하지 않았다.

이발사가 죽고 난 뒤 그가 살았던 집 근처에서 슬픈 음악소리가 들렸다. 이발사의 영혼을 위로하듯 감미롭게 다리 위에서 울렸다. 음악을 연주하는 이는 한 두 명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연주하기도 했고 낯선 얼굴이 연주를 하고 가기도 했다. 음악에 입이 있기라도 하듯 말이 돌았다.

그가 죽음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희생을 막았다고, 그의 사위인 청년은 난폭한 미치광이었다고, 광기에 휩싸일 때 저지른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다른 말도 돌았다.

그는 딸을 너무 사랑해서 딸 없는 하늘 아래에서 더 이상 살 용기가 없었을 거라고, 딸을 죽인 사위(청년)의 죄를 차마 말할 수 없었을 거라고, 딸을 사랑한 것만큼 청년도 사랑했을 거라고, 그래서 그가 죄를 뒤집어쓰고 죽었을 거라고. 여러 소문이 다리에서 시작되어 음악과 함께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그 다리 이름을 ‘라제브니키 다리’ 또는 ‘이발사의 다리’라고 불렀다.

세 시간 기차를 타고 도착한 체스키 크룸로프. 블타바 강의 시작점인 그곳. 전날 눈이 와서 주황색 지붕이 하얗게 덧칠된 동네. 혼자 걸어가고 있을 때 그곳 아이가 다가와서 하이파이프를 하자면 손을 쳐들었을 때 전해졌던 따뜻한 온기의 여운. 로즌 베르크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영주성과 그 구조. 그리고 목조 다리인 이발사의 다리와 그곳에 세워진 카렐교에 있던 성상, 얀 네포무츠키.
 

이발사의 다리에 있는 얀 네포무츠키 동상. ⓒ차노휘


여러 이미지들이 한꺼번에 그려졌지만 생동감과 리듬감이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나는 아침을 맞이했고 휴게실 문을 여는 커플을 보았다.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있는, 앳된 얼굴로 수줍게 웃는 여학생이었다.

아, 내 눈에는 고등학생 정도로 보였다. 그 옆에 있는 남자 또한 어리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둘은 새벽녘의 예술(?)을 들키기라도 한 듯 아주 조용하고 수줍게 아침 식사를 했다.

휴게실 창문 너머에서는 크룸로프의 주황색 지붕 위에 쌓인 눈 위로 햇살이 비칠 때처럼 눈부신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이제 시작인 것이다. 예술도 사랑도.
 

블타바 강변 절벽 위에 우뚝 자리한 체스키 크룸로프 성. ⓒ차노휘


** 글쓴이 차노휘는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다. 소설집《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가 있다. 문학박사이며 광주대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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