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이시여 56억 년 뒤가 아니라, 어서 오시어 천지를 개벽하소서”

황산벌은 백제가 두 번 멸망한 곳이다. 한 번은 계백의 백제가, 또 한 번은 견훤의 후백제가 최후의 격전을 벌이며 역사 속으로 사라진 땅. 백성들은 백제의 유민이었다가, 신라의 식민이었다가, 후백제의 난민이었다가, 이제 고려의 국민이 되어야 한다.

고작 삼백여 년 사이에 도대체 나라가 몇 번 바뀌고 임금은 또 누구인가! 장정들은 전장에서 다 죽어나가고, 농사지어봤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늙은이와 아녀자와 어린 것들의 절망의 땅.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다. 비루하게 연명하는 그 속에서도 장구한 뿌리는 백제였고, 삶을 지탱하는 한줄기의 빛이 있었으니, 그것이 미륵이다.

어느 봄날 반야산에서 한 여인이 나물을 뜯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곳에 가보니 갑자기 거대한 바위가 솟아 올라왔다.

이를 관에 알렸더니, 조정에서 기이하게 여겼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큰 부처를 조성하라고 하늘에서 내려준 길조”라 결론짓고, 금강산 혜명 대사를 불러 석불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광종 19년, 968년의 일이다.(관촉사 사적기) 후백제의 멸망(935)으로부터 불과 32년 지났을 때다.

망국의 설움과 울분이 채 가시지 않았을 것이고, 고려에 대한 충忠이 싹트기에는 아직 짧은 세월이다. 그들에게 저항의식을 약화시키면서 고려 국민으로 일체감을 갖고 복속시키기에 이만한 대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월간 불광 제공

일주문 안으로 가을이 들어오고 있다. 처서處暑에서 더위는 멈추고, 단단하게 묶여 있던 여름은 맥없이 풀려 물처럼 흘러간다. 그 자리에 엎드려 있던 가을이 바람 따라 다가와 살갗에 닿는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것이 순간이다.

들에는 매미 울음소리 사라지고 쓰르라미가 운다. 푸릇푸릇하던 것들이 누릇누릇하게, 기다리며 뜸을 들이는 시간이다. 지금 안 익으면 영영 못 익고 만다. 익어간다는 것은 단맛이 드는 것이고, 누렇거나 붉어지는 것이고, 약간은 쭈글쭈글해지는 것이다.

천하에 소슬한 기운이 가득한 밤하늘, 은진미륵 위로 별이 총총히 떴다. 머잖아 칠석이다. 태초의 색처럼 검푸른 우주를 배경으로 한 가닥 흰 구름이 지나가고, 북으로 북극성이 제 모양을 드러내고 있다. 동쪽으로는 견우성과 직녀성과 데네브, ‘여름의 대 삼각형’을 이룬 세 개의 별이 밝게 빛나고 있다.

저 거대한 석불은 미륵인가, 관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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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 주지 혜광 스님은 “그거 여전히 논란이라.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관음상이 맞아요. 넓이가 한 평이나 되는 부처의 큰 갓 위에 금동화불을 두르고 있었다고 하고, 오른손에 연꽃을 들고 있잖아요? 그러니 관음상이지, 현세불이라. 저렇게 생긴 미륵불 봤어요?”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진미륵이라고 하잖습니까? 미륵하고 관음은 뭐가 다른가요?” 하고 내가 물었더니, 스님은 “미륵불은 투박하면서도 온화한 미소가 이웃집 아저씨같이 정겹고 그러잖아요? 그것은 먼 훗날에 올 부처라, 미래불未來佛이지. 그런데 관음은 당장 중생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구원해주는 현세불現世佛”이라고 설명했다.

석불은 높이 18.2m, 둘레 9.2m, 귀 길이 2.7m, 큰 갓이 3.3m로 우리나라 최대 석상이다. 아파트 7층 높이다. 지금도 큰데 당시엔 얼마나 어마어마했을까?

그런데 부처의 미소가 없다. 몸에 비해서 거대한 머리, 팽팽한 두 볼이 주는 긴장감, 옆으로 길게 찢어진 부리부리한 눈과 뭔가를 노려보는 듯한 눈빛, 꽉 다문 입술. 마주 볼 수도 없고, 우러러봐야 한다. 자비롭기보다는 위압적이며,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석불은 밑으로 받침돌이 되는 너른 바위 위에 3개의 돌로 세워져 있다.
 

ⓒ월간 불광 제공

맨 꼭대기 갓에서 얼굴까지가 하나, 가슴과 손이 양각되어 있는 상부가 하나, 허리 아랫부분 하부가 하나. 왕명을 받은 혜명 대사는 석공 1백여 명을 데리고 대불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워낙 거대하게 조성하다 보니, 원래 솟아오른 돌은 허리 아랫부분 짓는 데 다 써버렸다.

가슴과 머릿돌은 12km 떨어진 다른 마을에서 조각을 한 뒤에 1천여 명을 동원하여 옮겨 왔다고 한다. 문제는 6m가 넘는 거대한 돌 2개를 어떻게 쌓아 올리느냐 하는 것이다. 운주사 와불臥佛도 원래는 입불立佛로 조각했는데 그것을 바닥에서 떼어 세우지 못해 와불이 된 것이다. 그렇게 근심하던 차에 어느 날 냇가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아이들은 큰 돌 하나를 세운 뒤에 가장 높은 곳까지 모래를 평평하게 덮고 다시 그 위에 돌을 하나 올린 다음에 모래를 덮고 하면서 돌쌓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석불을 둘러싸고 거대한 흙 빌딩을 만든 뒤에 나중에 흙만 제거하는 피라미드 건축과 비슷한 방식인데, 문수보살이 아이들로 현신하여 지혜를 준 것으로 전해 내려온다.

광종은 강력한 왕권을 과시할 상징이 필요했다. 투쟁과 저항의 상징이었던 황산벌에 당시로써는 첨단기술을 총동원한 또 하나의 상징, 고려 최대의 석불을 무려 37년에 걸쳐 건립한다. 그 앞에 석등도 힘차고 아름답다. 높이가 5m가 넘고 둘레가 4m에 이르는 보물 232호. 우리나라에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크다.
 

ⓒ월간 불광 제공

석불과 석등이 저마만 했으니, 그것들과 어울려 지었을 목조건물들은 또 얼마나 장대하고 미려했을까. 관촉사는 후백제의 호족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백성의 지지를 얻고자 했던 일석이조의 정치적 산물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연꽃을 든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세상 소리를 다 듣고 소원을 들어주는 구세救世보살이다. 반면에 미륵불은 지금의 이 고통을 참고 견디면 훗날 천지개벽의 새 세상이 올 것이라고 기약하는 꿈의 부처다. 그것은 늘 반체제적이고 혁명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후삼국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궁예와 견훤이 미륵을 이용했지. 현세 재림 미륵이라고. 지금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는 매혹적인 이데올로기 아니겠어요?”

“거기에 광종이 미륵불을 세울 이유가 없다 이 말씀이시죠?”

“그렇지. 지금 이 고려의 세상도 마음먹기 따라 다른 것이다. 자기가 선업을 쌓고 복을 지으면 바로 구원받을 수 있다. 딴 맘 먹지 말고 저 관음상에게 부귀와 소원을 빌어라. 고려는 이 정도 거대한 구조물을 쌓을 만큼 선진문명국이다. 여기에 반항하면 또다시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저 관제미륵 속에는 그런 엄포와 회유가 들어 있는 거라.”
 

ⓒ월간 불광 제공

은진미륵은 반야산 중턱에서 동쪽으로 너른 황산벌을 굽어보듯이 서 있다. 그런데 신묘하게도 절에서 내려와 멀리 저 석불을 바라볼 때는 정말 미륵처럼 다른 느낌을 준다. 

가까이서 보면 근엄하고 위압적인 반면에 멀리서 보면 친근하면서도 믿음직한 일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광종은 ‘관제관음상’으로 조성했지만, 백성들은 ‘민중미륵불’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석불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나라에 정책이 있으면, 백성에겐 대책이 있는 법. 너는 관음이지만, 나는 미륵이다, 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그래서 은진현의 이름을 따서 은진미륵으로 불렀으며, 그에 대한 기원도 누대로 살아오던 옛 백제의 부흥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바람 부는 가을 밤하늘 속으로, 천 년 전의 별빛이 지금 도착하여 아득한 옛이야기를 들려주느니. ‘그러니 미륵이시여, 굽어살피소서. 이 삼계화택의 천지를 개벽하고 새로운 용화세상을 위해. 미륵이시여, 56억 년 후에 오실 것이 아니라, 어서 오소서!’                    


** 이광이는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다.

** 윗 글은 월간<불광>에 연재 중인 <이광이의 절집 방랑기>를 출판사와 필자의 허락을 받고 재게재한 것 입니다. (www.bulkw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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