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조각가 김 광 례

무슨 말을 먼저 할까. 작가의 작업실에 다녀 온 후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만 빙빙 돌고 있는 문장들이 도무지 활자로 나오려 하질 않았다. 글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별리, 분리, 분절, 절연, 절망, 공황, 해원, 레테의 강까지 분절된 단어들만 떠오를 뿐이었다.

천정이 우물처럼 깊고 높았던 작가의 작업실. 그리고 그 안을 어머니의 자궁처럼 안온하고 깊게, 어둠으로 흐르던 빌 더글라스의 장중한 음악들. 먼 곳을, 생각지도 않았던 다른 세상을 보고 다녀온 것만 같았다.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일까. 생각의 끝에서 찾아낸 단어는 죽음, 그리고 해원(解員·解冤), 인연과 날개였다.
 

김광례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제공

우리는 모두 태어나고 죽는다. 살(肉身)을 가지고 태어나고 결국은 먼지로 사라진다. 어머니의 자궁을 통과해 세상에 나오고 대지의 자궁 안에서 다시 먼지로 태어난다. 우리는 분리되지 않은 채 분절된 기억만을 다만 가질 뿐이다.

삶과 죽음은 동의어다

알 수 없었다. 작품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 다시 들여다보면 손을 내밀고 맞잡아 달라는 요구. 그 강렬한 느낌들을. 탈골되어 이미 사라진 살이 존재하지 않은 뼈와 뼈들이 연골과 보이지 않은 인연들로 연결되어 신호를 보내고 더듬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호들을 읽기에 바빴다.

작업실 안, 이곳저곳 뼈가 있었다. 선반 위에 사람 머리뼈가 있고, 닫혀 지지 않을 정도의 높이만큼 뼈들이 서랍에 담겨있었다. 206개의 뼈가 직립으로 서서 옷을 걸치고 모자를 쓴 채 사람의 전신으로 물끄러미 작가를 바라보고 작가는 뼈들의 사이에서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일상을 보내고 맞고 있었다.

작가는 “죽음은 언제나 내게 가까이 있었다. 삶이란 골목을 돌다 모퉁이 어디선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이내 마주쳤다. 중학교 때 가족의 죽음 앞에서 절망했던 것을 시작으로 최근, 어머니의 죽음까지. 마음이 다잡아지려 할 때면 죽음이 먼저 내 앞에 나타나 죽음이란 단어를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고백했다.

평면은 작가의 조형언어에 늘 부족했다. 회화를 전공했으면서 다시 조각을 공부하려 한 것도 자신의 언어를 찾기 위한 길이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만의 조형을 찾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내면의 고독한 조형언어의 모자이크를 시작으로 어눌한 마블링(Marbling) 상태를 지나 자신만의 언어를 찾았다. 설치조각이었다.

레테의 강을 건너 우리는 만나고 헤어진다.

작가의 작업은 ‘배’로 완성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있는 이편과 죽은 자들의 저편 사이에는 강(江)이 흐르고 있고, 작가는 배를 띄워 이편과 저편을 오고 간다. 배는 이편과 저편의 매개자일 뿐 아니라 이편과 저편을 오고가면서 ‘해원(解員·解冤)’을 동시에 촉구한다.
 

ⓒ광주아트가이드 제공

태어나고 죽는 순간 살에 걸치는 옷감은 생애 모든 것을 잠재우며 천정의 높은 곳에 걸림으로서 동시에 기억을 함구하게 한다. 어쩌면 <그대 이제 잘 가라>는 지난 전시의 명제처럼 한 발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이 배의 역할을 해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족의 죽음을 넘어 작가는 세상의 모든 죽음에 간절한 ‘위무(慰撫)’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킬링필드로 알려진 캄보디아의 200만 명의 죽음 앞에서도 작가는 위무의 진혼제를 올리며 해원을 보낸다.

700장의 인물사진과 700개의 머리뼈들은 의도하지 않았던 공통숫자를 가졌다. 남녀노소를 불문한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은 해맑다. 왜 죽어야 하는지 예측할 수도 예정하지도 않았던 죽음 앞에서 인물의 표정에는 누구 나에게처럼 내일이 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순간 사라졌다. 누구에게나 삶은 열려있다. 간구해서 얻어지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분명한 것은 자기만의 몫이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의 작업에서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자신만의 해원의 방식이다.

설치조각가의 조형언어로 표상하는 자신만의 죽음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가장 정확하게 죽음과 삶은 절대 공간을 넘어 동의어로 작동되고 있음을 인지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상 서랍을 열었다. 뼈가 수북했던 작가의 서랍을 연상하는 순간, 날개를 가진 노랑나비 수십 마리가 살랑거리며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작가의 서랍 속, 직립으로 서 있던 206개의 뼈들이 노랑나비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대. 이제 잘 가라. 부디 편안해지시라.
 

** 윗 글은 <광주 아트가이드> 96호(2017년 11월호)에 실린 것을 다시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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