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40년 미담(美談·未談·微談) - 광주포크음악 원년 박문옥

간판도 없는 3층 녹음실. 시간이 멈췄다. 녹음실 풍경은 더께 앉은 먼지처럼 적요하다. 한 번 들어온 탁자와 의자는 3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자신의 피부에 몸을 맡겼던 이들을 기억한 채 여전히 그 자리다.

머물던 이들이 손을 씻었던 세면대 역시 무릎 높이인 채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더 깊이 허리를 숙이라 요구한다. 기억은 윤기를 더해 반질반질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과 손길을 받아준 마룻바닥과 의자는 거친 곳 하나 없이 둥그레지며 하나같이 윤기가 났다.

이곳은 광주음악의 산실이다. 격동의 시대와 민주화 요구를 열망하던 엄혹한 시절에도 흔들림 없이 노래하고 녹음을 했으며 시대가 요구하는 민중가요와 노래가 된 생각들이 태어났던 격렬한 역사의 현장이다.

지나간 시간은 언제나 위대하다. 낡은 컴퓨터 앞, 작은 창 너머로 여전히 푸른 나무가 보인다.

포크 음악의 광주성을 찾아가다

거칠지만 부드럽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자존심이 현재의 박문옥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것처럼 모난 돌은 사라지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킨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은 자존심이 광주 포크 음악의 원년을 세웠고, 전국순회 콘서트를 가진 유일한 로컬 뮤지션이 되었다.

박문옥은 “함평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마을 잔치에서 들리는 북소리의 굿거리장단을 기억하고 북을 쳤던 기억은 내가 갖는 기억이기 전에 마을 어르신들이 들려준 이야기이다.”며 “음악이 그림을 전공하던 내 발목을 잡은 것은 이미 예견되었던 것 같다.”고 고백한다.

연예인도, 방송인도 아니다. 유명하지도 않고 일반인들은 박문옥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 중 <직녀에게>를 설명하면 누구도 망설임 없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통일이 주제인 노래 한 곡으로 그의 활동에 대한 모든 것을 얹힐 수는 없다. 박문옥은 그런 존재다. 달의 뒷면의 그림자 같지만 ‘무엇’이 되려면 ‘당연히’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음악인으로 있어서 누구나 존경한다.

1980년 대, 엄혹한 군사독재 정권 하에서 광주의 민중가요는 테이프라는 형식으로 전국을 넘어 세계로 전파되었다. 전파된 민중가요는 거리에서 폭풍처럼 불러졌고 시위현장에서 기폭제 역할을 해냈다. 박문옥은 “광주라는 지역에서 음악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교직을 그만두고 음악의 길로 들어섰을 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운동가요 녹음과 테이프 제작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보다 나은 음질을 위해 한강 이남 최초로 녹음실을 설치했고 30여 년이 되는 시간동안 이 자리에서 지역음악의 센터장처럼 이 자리에 있다.”며 “녹음실은 오고 간 사람들을 기억하게 한다. 20여 장의 음반을 이곳에서 녹음했던 범능스님은 잊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문옥이 있어 광주는 행복하다

데뷔 40년 음악회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박문옥은 대학4학년 때 참가한 대학가요제 <저녁무렵> 수상으로 이 지역의 포크 음악의 원년을 세웠고, 광주 최초로 창작 포크 콘서트를 열었으며 광주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한 최초의 뮤지션이다. 또, 후배들로부터 <박문옥 40년 헌정_The Respect) 콘서트를 헌정 받은 지역 최초의 뮤지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추구하는 음악에 대한 정체성이다. 인간의 가장 인간다움(humanism)과 예술적 자유(自由)는 그의 모든 음악에 서정성과 저항정신이 철저하게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대중음악의 상업성에 손을 내밀지 않은 채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음악의 길을 향해 갈 뿐이며, 마침내 대중을 끌어가는 이유가 될 것이다.

박문옥은 “40년 음악은 내게도 특별한 이정표였다. 마이너리그에서 오선지와 기타를 들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할 수 없었고 광주의 학살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음악이 밥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지금껏 나를 있게 한 것은, 우습게도 음악의 자유로움과 인간성이었다. 운동권의 열렬 투사도 아니지만 오월항쟁과 환경, 통일 현장에서 노래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고 이야기 한다.

로컬 뮤지션의 또 다른 신화를 만들었다. 지역의 음악인들이 현실과 부조리에 타협하지 않고 방송활동으로 유명해지지 않아도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음악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작곡자이고 연주자이며 전 과정을 모두 소화해내는 뛰어난 연출가, 엔지니어인 그의 활동을 앞으로도 기대한다.

데뷔 40년 음악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가 있어 광주는 행복하다.

** 윗 글은 <광주 아트가이드> 94호(2017년 9월호)에 실린 것을 다시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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