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현이의 문화in] 관계 맺기에 천착하는 한국화가 이두환

덥다. 연일 내리쬐는 열사에도 아랑곳없이 작업 중인 작가를 모란꽃 그득한 마당에서 만났다. 의재 창작스튜디오였다. 2층으로 올라 작업실에 들어섰을 때 낯익은 모자들을 발견했다. 

색을 입히고 오려낸 모자들은 다른 모자들과 얽히고 서로 덧입혀진 채 새로운 모자를 형상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모자가 벽에 걸려있는 것이 아닌, 육중한 몸을 이끌고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이 생소했다.

작가는 이곳에서 12월까지 레지던스를 한다. 오전에 출근해 작업을 하고 늦은 오후가 되면 돌아간다. 작업대에는 앙증맞은 사이즈의 작은 모자들이 다음 작업의 진행을 기다리고 모자를 품어줄 캔버스들이 물감을 머금은 채 건조 중이다.

작가는 “하나의 형상, 즉 새로운 작업을 해내기 위한 과정이 어렵고 두렵다. 그래도 작업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즐겁고 편안한 상태라는 것을 알기에 더디더라도 한 걸음씩 내딛는다.”고 고백했다.

삶은 관계 맺기의 연속

현대인의초상 - 이두환. 130×130(장지,채색혼합)-2013.

이방인 같았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채로 발을 담그고 지냈다. 난, 여전히 처음 그대로 나 자신이었는데 주변은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었고 환경은 경계인으로 치부했다. 세상은 점점 낯설어졌다.

타지에서 지내다 선택한 대학은 작가를 광주로 오게 만들었지만 이방인이 되었고, 이곳에서 생활하다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시 경계인이 되었다. 작가는 “여전히 나는 그대로인데 환경은 자꾸 나를 밀어내고 유리벽 같은 경계선을 만들었다. 힘든 시기였다.”고 대학시절을 이야기했다.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자신의 내면으로 깊어졌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묶여진 지역의 한계성을 바라보며 섬에 홀로 뚝, 떨어져 있다는 느낌으로 자신의 작업을 끌어냈다. 

이방인과 경계인만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결과적으로 작가의 화폭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단순화 된 형상으로 형태가 쉽고 터치가 많은 작업 역시 한국화 재료를 사용해 전통을 현대적 기법 안에 사용해 이해도를 높였다.

초기의 작업들이 인물화로 형성된 이유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인물화는 곧 자신의 초상이었다. 각종 동물들의 이미지를 차용해 얼굴이 형성되지 않은, 눈, 코, 입이 부정형적인 표현을 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가까이 보면 동물의 이미지를 찾아낼 수 있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인간의 모습처럼 보이는 형태 역시도 작가의 치밀하게 계산된 의도였다. 또, 인간의 형성 얼굴이 아닌 채로 인물화는 형상화 되었고, 작가는 이 인물의 초상에 자신의 부적격한, 부정확한, 부초 같은 삶의 환경에 지배받으며 정주민의 자아 굴곡을 심도 있게 담아냈다.

현대의 초상은 곧 나의 내밀함

마침내 작가를 작가답게 끌어낸 것은 관계 맺기 속에서 도착한 ‘현대인의 초상’이다. 그리 멀지 않은 지난 시간 안에서 작가는 자신이 겪었던 이방인과 경계인에 대한 소외감의 내밀함이 결국 자신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단지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보이지 않은 어떤 것의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에는 모자(중절모, Fedore)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높이가 훌쩍 올라간 모자는 무대 위에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마술사의 모자와도 닮았다. 신사의 수트(Suit)를 완성하는 모자는 자신을 드러내는 아이콘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감추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

이두환 화가.

작가의 작업에 등장하는 모자에는 작가가 하고 싶은 다양한 의미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사슴의 뿔처럼 우뚝 삐져나온 뿔의 형상은, 모자를 쓰고도 가려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이며, 더 높아진 모자의 길이는 감추고,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내밀함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뜻한다.

모자와 모자의 형상이 레이어드 되어 또 다른 모자의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쩌면 자신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더불어 숨겨도 숨겨지지 않은 나란 존재의 다양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작업도 있다. 아직은 두려운 작업들이다. 물론 내용은 현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완성도를 높이는 형태에 대한 준비가 끝나면 새로운 작가만의 방식으로 새 세상으로 진입할 것이다. 이방인이나 경계인이 아닌 정주민의 발걸음으로 당당하게.

결국은 다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세상을, 삶을 이렇게 바라보는데, 넌, 어때?”

** 이 글은 <광주 아트가이드> 93호(2017년 8월호)에 실린 것을 다시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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