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능력의 향상을 가져온 기차,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세계최강이라고 자부하던 러시아의 발트 함대가 중국 뤼순에 주둔 중인 러시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발트 해를 출발했다. 그 무렵, 영국과의 마찰로 수에즈운하를 통과할 수 없게 된 발트 함대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야했다.

함대가 항해를 시작한 지 넉 달이 지나 인도양에 막 접어들 때였다. 함대사령관 로제스트 벤스키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타전됐다. 뤼순항이 일본군에 의해 이미 함락됐다는 거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선행 병영열차. ⓒ유용원의 군사세계 갈무리

만약 발트 함대가 좀 더 빨리 뤼순항에 도착했다면 전쟁의 결과가 어땠을까? 과연 일본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주력함대를 미리 이동시키지 못한 러시아의 전략적 실수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전쟁에 있어 신속한 병력동원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이보다 더 좋은 예는 없다.

예부터 군대와 군수물자의 원활한 수송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절대 요소였다. 병력과 무기, 군량이 제때에 보급되지 않으면 승전은 고사하고 전쟁수행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전력이 조선을 압도하고도 승리하지 못한 것은 해전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보급로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나폴레옹 군대가 러시아의 후퇴작전에 말려들어 모스크바 일대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있을 때 만약 군수품을 실은 열차가 모스크바 역에 도착했다면 나폴레옹은 당연히 승리했을 것이고, 세계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세상에 기차가 없었다.

유사 이래로 기술이 진보하거나 새로운 것이 발명되면 언제나 전쟁도구로 이용되는 일은 하나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과 짐을 삽시간에 먼 곳까지 편리하게 실어 나르는 기차가 전쟁에 동원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기차가 세상에 나오자 군사 전략가들은 기차야말로 전쟁수행에 꼭 필요한 병력과 군수물자의 신속한 이동이란 당면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줄 획기적 수송수단으로 보았다.

크림전쟁 때부터 동원된 기차,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소로 작용

그리스로 향하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 병영열차 - 1941년 4월. ⓒ유용원의 군사세계 갈무리

기차가 전쟁에 동원되기 시작한 것은 크림전쟁부터다.

1853년 부동항을 얻을 욕심에 러시아가 오스만제국 침공하자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제국을 도와 크림반도 일대에서 전쟁을 벌였다. 개전초기, 영국군은 러시아 요새를 포위하며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거센 저항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보급품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아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 어려운 지경에 놓였다. 영국정부는 고심 끝에 흑해 연안 항구에서 자국군 진지까지 철도를 놓기로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건설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기관차등을 배로 실어와 영국군 거점까지 40킬로미터나 되는 철로를 건설했다.

철도가 완성되자 고된 전투와 질병으로 기진맥진해 있던 병사들에게 당장 식량과 실탄, 의료품을 무제한 공급할 수 있었고,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기차의 기동력과 수송력이 전쟁승리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때 영국군은 보급품을 실어 나르는 화차를 개조해 만든 병원객차로 사상자를 실어 나르기도 했다. 덕분에 촌각을 다투는 부상자의 구호와 치료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크림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한 기차는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갈등으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눈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그 진가를 톡톡히 발휘했다. 앞선 전쟁에서 교훈을 얻은 미국은 전쟁에 대비해 기차를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미리 세워 두었다. 철도의 중요성을 알아본 링컨 대통령은 전운이 감돌자 모든 철도를 연방정부의 통제아래에 두면서 민간 철도회사 관리자를 군 장성으로 임명해 철도시설의 관리를 맡겼다.

그리스로 향하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 병영열차 - 1941년 4월. ⓒ유용원의 군사세계 갈무리

전쟁이 발발하자 남․․북군은 서로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북군이 우세를 보이며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북군이 주도권을 잡은 가장 큰 이유는 남군에 비해 철도보유노선이 많아 병력과 군수물자를 제때 수송한 반면, 남군은 보유노선도 적을뿐더러 궤간(軌間)마저 서로 달라 보급품의 적기 수송이 원활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전투가 벌어지는 내내 특히 철도차량과 시설물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는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수세에 몰린 남군은 북군의 차량기지를 기습해 기관차를 파괴했으며 철도역과 전신국을 공격해 그곳에 불을 질렀다.

철도의 열세를 극복하기위해 철도시설의 파괴로 맞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철도를 기반으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한 북군으로 차츰 기울어 결국 북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을 맺는다. 전쟁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은 북군의 승리 비결을 철도에서 찾았다. 여기서 교훈을 얻은 20세기 군대에서는 영화 ‘레마겐의 철교’에서 보듯 전쟁이 때마다 철도를 사수하는 것이 하나의 철칙처럼 굳어졌다.

장갑을 두른 기관차에서 탱크와 장갑차 발명의 단초가 되기도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의 폭격에 맞은 북한군 화물열차가 강원도 철원군 월정리역에 전시되고 있다. ⓒ<다음> 갈무리

1867년에 일어난 보어전쟁과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의 전쟁에서도 기차는 앞선 전쟁과 마찬가지로 군수품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벌인 보어전쟁 때는 기차가 직접 공격무기로 사용되는 일도 있었다.

영국군이 기관차에 두꺼운 철제 장갑을 씌워 레일을 타고 직접 적진을 돌파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훗날 20세기에 발명돼 커다란 위력을 발휘한 탱크와 장갑차의 단초가 여기서 비롯되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이처럼 기차는 발명과 동시에 거의 모든 전쟁에 동원되어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음은 물론 승리의 보증수표가 되었다. 그러나 기차를 이용한 군대와 군수물자의 손쉬운 이동은 전쟁의 편리성을 증대시킴으로써 대규모전쟁을 불러오고 말았다.

특히 지난세기에 일어난 제 1·2차 세계대전이 사상 유래 없이 세계적 규모로 커져버린 것도 따지고 보면 기차로 대표되는 운송장비가 군수능력의 향상을 가져온 탓이 컸다고 말할 수 있다.

‘호모 노마드’라는 유목본능을 가진 인간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발명된 기차가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켜 인류평화를 위협한 점은 참으로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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