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30돌 기념 ‘응답하라 1987’전시 이상호 · 전정호 화가

백두산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1987년(*2005년 복원)- 이상호. 전정호 화가. ⓒ광주아트가이드 제공

길을 오가며 이상호 작가를 만났다. 스님이 되겠다며 절에서 수행 중이란 말도, 무릎을 꿇고 앉아 부처를 그리고 있다는 말도, 여전히 시대적 아픔과 함께 묵언수행 중이란 말도 바람결을 따라 들려왔다. 때로는 막걸리 몇 사발로 불콰한 홍조 빛으로, 뭔가 극적인 생각으로 산란한 눈빛으로 작가는 마주쳤다.

일찌감치 작업실을 얻어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는 전정호 작가는 전시를 앞두고 주로 만났다. 미순이, 효순이 사건을 촉발로 광우병 사태까지 촛불로 이어지던 과정이 작가의 작업 안에 그대로 녹아들어 한편의 대서사시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들이 1980년대처럼 다시 뭉쳐 관람객들을 만난다. 6월 항쟁 30주년 기념 ‘응답하라 1987’전이다.

우리는 현장에 있었다.

둘은 항상 같이 있었다. 사람들은 전 작가를 만나면 이 작가를 궁금해 했고 이 작가를 만나면 전 작가를 물을 만큼 한 몸이었다. 같은 시대 같은 학교를 다녔고 같이 그림을 그렸다. 전 작가는 “1987년은 투쟁의 한 해였다. 그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봇물처럼 터져 나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위현장에서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이한열 열사의 사망사건은 6월 항쟁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 6·29 노태우정권으로부터 항복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7월에는 노동자들의 대투쟁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직선제 개헌이 이뤄졌다. 30년 전인 그때 광화문에 이미 백만 인파가 모여 민주화를 열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상호(왼쪽). 전정호 화가. ⓒ광주아트가이드 제공

두 작가는 완성한 매체를 가지고 시내에서 전경들과 싸움과 선전을 거듭했다. 현장에서 사용될 걸개그림을 그리는 것이 주된 과제였다. 사회단체인 시각매체연구소와 학내 미술패와 병행해 활동했으며 시위에 사용할 깃발과 플래카드, 걸개그림 등을 제작해 6월 항쟁에 더 깊이 관여하고 스며들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선전매체를 제작하며 미술운동을 주도했다.

그 당시 미술운동 인자는 거의 전무했다. 더구나 후배들을 연행되게 두고 볼 수도 없었다. 결국 모든 제작은 둘이서 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다. 전 작가는 “사이즈가 커서 작업할 공간을 찾아 헤맨 것이 기억에 남는다. 플래카드 쓸 공간이 없어 실크인쇄를 주로 했다. 

백골단 해체와 최루탄 추방,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였으며 새벽 2~3시 무렵 우리는 완성된 벽보를 붙이고 청소부는 다시 뜯어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인간의 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던 일도 있었다. 옥상에서 작업중, 신나를 사용하다 불이 났는데 순식간에 모래를 구해 불을 끈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인간의 한계란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며 웃었다.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

이번 전시에는 1987년 민주화 시위 현장에 걸렸던 걸개그림, 판화, 깃발그림, 만장 형식의 현장미술 시각매체들이 40여점 전시되었다. 1987년 두 작가가 제작한 17점의 목판화와 고무판화 작품, 그리고 판화 원판 일부를 직접 볼 수 있다. 나머지 작품들도 2006년 복원한 것들이다.

특히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향성을 각인시켰던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의 전시는 의미가 깊다. 이 작가는 “이 걸개그림은 1987년 8월 해방43주년 대동제에 걸릴 예정이었다. 

민족 자주를 표방하던 당시의 분위기 그대로 이 걸개그림에는 반외세, 반독재를 기반으로 조국의 형성과 미래를 내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한반도를 조종하고 있다고 여겼으며 조국의 민족자주 형성에는 반드시 미제국주의의 축출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같은 내용은 풍자로 이어져 미국대통령 머리 위로 오줌을 싸는 백두동자로 이어졌다. 미국을 반대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결과였다.”고 그림에 대한 설명을 했다.

여전히 앞으로 나아간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지난 4월 25일부터 오는 7월 30일까지 '6.10항쟁 30주년 기념 민주.인군평화전'이 열리고 있다. ⓒ광주아트가이드 제공

이상호 작가는 “현장 중심 시각매체물들이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이 거의 없어 아쉽다. 그림은 곧 시대의 표상이다. 당대를 표현한 걸개그림들과 깃발 그림 등이 인쇄물로만 남아있고 적절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무엇보다도 현장성을 가진 시각매체 자료임이 틀림없다.”며 안타까워했다.

1987년 4학년 재학 당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를 제작했다. 노동자와 농민이 미국의 성조기를 찢고 미국대통령 머리 위로 백두동자가 오줌을 싸는 표현이 문제가 돼 미술인 최초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수감됐으나, 현재까지 국내상황과 미국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회자되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고등학교 시절 서로를 만났고 이후 46년째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그저 만나면 반갑고 보지 않더라도 생각만으로 충분히 든든한 울타리다. 서로에게 친구이자 미술운동의 증언자 역할을 해낸다.

이 작가는 1990년대 초반부터 감로탱에 관심을 가졌다. 동학의병에서부터 4·19, 5·18민주화운동을 거쳐 6·10항쟁까지 민중미술을 바라보고 민중의 삶을 담는 작업의 개념 또한 여전하다.

전 작가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그림의 형식은 변화를 거쳤다. 새로운 도전인 셈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민중적인 삶과 사회모습, 아픔, 순환의 가치는 녹아들어있다.

30년 전과 여전히 같은 선상에 있는 지금은 대선을 거쳐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시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지난 겨울동안 촛불을 들게 만들었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국정농단 주범들을 법정에 세우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너무 밝게 웃으면 안될 만큼.

** 이 글은 <광주 아트가이드> 91호에 실린 것을 다시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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