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카네기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준 기차

19세기 미국에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미국인들이 존경하는 앤드루 카네기와 존 록펠러가 최고의 부자였다. 그들은 각각 철강왕, 석유왕으로 불리며 미국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두 사람이 죽을 때 남긴 유산을 모두 합하면 800조원이 넘는다고 한다. 현재 미국 전체 GDP의 3퍼센트가 넘는 금액이며 이스라엘 국민 총생산의 네 배에 해당하는 천문학적 규모다.

21세기 최고의 부자라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도 액수 면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니, 보통 사람의 짐작으로 그들이 쌓은 부의 규모를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현 시세로 따지더라도 빌 게이츠의 재산은 카네기 재산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두 재벌이 일군 부의 규모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럼 카네기는 어디서 그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까?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미국 역사와 함께 시작된 이른바 서부개척시대는 미국인들의 사업적 모험심과 용기를 촉발시킨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그들은 뛰어난 창의력과 남다른 안목으로 사업 수완을 발휘해 미국의 산업화에 기여하며 동시에 대자본가로도 성장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부를 얘기할 때 남북전쟁 이후에 일어난 철도붐이 그들의 사업에 가져다 준 엄청난 혜택을 간과해선 안 된다.

철도는 근대 미국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미국의 산업화와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미국의 역사에서 19세기를 ‘철도시대’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869년 서부와 동부를 잇는 대륙횡단철도의 완성으로 철도시대는 그 절정에 이른다. 이후 철도망은 미국 전역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 1900년경에는 무려 32만 킬로미터로 유럽 전체에 놓인 철로 길이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세계 철도 연장의 40퍼센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길이였다.

철도의 팽창은 모든 산업에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상품 수송능력을 배가시킴으로써 기업 활동을 촉진시켰으며 국민생활 향상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었다. 결국 대기업과 대자본이 형성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미국에서 철도건설이 붐을 이룬 것은 국가의 지원책 때문이었다.

카네기 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가 미국 뉴욕에 1890년에 건립한 콘서트 홀.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석재로 건물 벽체를 매우 두텁게 만들어 음향 시스템이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남북전쟁이 공업화를 추구하는 북군의 승리로 끝나자 연방정부는 광활한 영토에 산재된 풍부한 자원을 수송하기 위해 철도 건설에 사활을 걸었다. 철도 회사에 보조금을 나눠주는 등 많은 특혜를 주면서 건설을 독려했다.

그 결과 전국적인 철도망을 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철도회사 상호간의 경쟁이 심해지고 독점과 합병 등을 위한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이른바 ‘트러스트’다. 트러스트란 개별 기업을 그대로 남겨 둔 상태에서 경영권을 하나로 통합하는 경영기법이다. 이는 현재 월가에서 행해지는 파생금융상품처럼 당시로선 기발한 합병 기법이었다.

철도 회사끼리 이루어지던 ‘트러스트’ 모델은 이후 다른 업종으로도 확대되었다. 석유왕으로 불리는 록펠러는 이보다 발전된 트러스트 모델을 만들었는데, 그도 이 방식을 통해 전국 정유업의 90퍼센트를 장악하여 대자본가로 성장했다.

철도 회사에서 시작된 기업 합병이 대자본가의 탄생을 가능케 한 것이다. 록펠러가 발전시킨 트러스트 모델은 훗날 철강왕 카네기에게 전수된다. 그도 이 방식을 통해 철강 산업을 독점하게 된다.

철도와 인연 맺은 카네기, 철도를 보고 철강 산업의 무한한 잠재력을 알아보다

카네기 평전.

가난한 스코들랜드 이주민 출신의 카네기는 어려서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우여곡절 끝에 철도회사에 들어가 전기 기술자로 일하면서 철도와 인연을 맺는다.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해서 지역 책임자의 자리에 오르지만, 이재(理財)의 귀재답게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침대 객차를 제작하는 회사에 투자하는 등 좀 더 큰 사업을 꿈꾸었다. 그는 일찍부터 철강 산업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여기에 주목했다.

인류에게 철기시대가 도래한 것은 2000년 전의 일이지만 철도시대만큼 철강의 수요가 한꺼번에 넘쳐난 시기는 일찍이 없었다. 당시 레일 1킬로미터를 건설하는데 강철만 약 80톤이 들어갔다.

그러므로 건설할 철로의 길이를 계산하면 어마어마한 강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더불어 철교는 물론 기관차와 객차, 화차 제작이 필요한 철강수요 또한 엄청났다.

카네기가 처음 철강회사를 세운 1873년은 훗날 도래할 1929년 경제공황에 버금가는 최악의 불경기였다. 그럼에도 회사를 설립한 이유는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철도는 미국 구석구석으로 뻗어나갔기 때문이다.

선견지명의 달인 카네기는 ‘하나의 사업에 전 재산을 건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전력투구했다. 그의 생각에 철강수요는 철도산업을 포함한 여러 분야로 파급돼 성장할 수밖에 없는 유망 업종이었다. 역시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가 회사를 차린 지 2년이 지나자 전국에서 강철 주문이 쇄도했다. 철도 산업의 활황에 따른 전후방 산업 연관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철도 레일뿐만 아니라 선박, 고층건물, 승강기, 교량 등 강재의 사용범위가 급속히 늘어났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뉴욕 맨해튼에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대형선박의 건조가 이루어지는 등 철강 수요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회사가 번성하자 카네기는 록펠러의 트러스트 모형을 받아들여 기업 합병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1909년, 카네기의 철강회사는 미국 강철 산업을 거의 장악하기에 이른다.

거부가 된 카네기는 이제 돈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미국 전역에 3000여개의 도서관을 짓고, 7000대가 넘는 파이프오르간을 기증했다. 부를 거머쥐자 자선사업가의 길을 간 것이다. 뉴욕 맨해튼의 유명한 카네기 홀은 그의 이름을 딴 세계적인 음악당이다.

카네기가 세계적인 부자로 성장한 과정을 살펴보면 찾아오는 행운을 놓치지 않고 창의적 사고와 모험을 통해 기회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카네기는 철도가 만들어 준 부(富)를 가장 많이 획득하고 잘 활용한 사람으로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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