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 운주사

운주사는 기억을 잃어버린 절이다. 야트막한 산의 평평한 골짜기를 따라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석불과 석탑들은 천년의 세월 동안 묵언 중이다. 말이 없으니, 개똥이 아비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저 돌은 누구이고, 왜 거기 서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돌들이 그렇게 서 있음으로 해서, 아득한 옛날 어떤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은 전해 온다. 세상 일이 대체로 모르는 것 투성이다. 나는 누구인지, 어느 바람결에 왔다 가는지도 모르는데, 하물며 저 돌의 사연을 어찌 알까?

오직 저 돌이 왜 저기 서 있을까, 옛 사람들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열망은 무엇이었을까, 라고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분명할 뿐. 그것 하나로 운주사 여행의 준비는 충분하다.

ⓒ월간 불광 제공

운주사는 돌탑과 불상의 이런저런 모양으로 보아 창건시기를 고려 11세기쯤으로 짐작한다. 지금이 21세기니까 천 년 전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이다. ‘운주사에는 천개의 석불석탑이 있고, 석실에 두 개의 석불이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다.’는 딱 한 줄이다. 그 기록이 있기 전까지 5백 년의 기억이 비어 있다.

왕조의 시간은 실록이 되고, 역사가 되지만, 민중의 세월은 구전되다가 흩어질 뿐, 필부의 삶을 누가 기록하겠는가? 이후 5백 년의 기록도 뭔가를 규명할 만한 것은 없다. 국운이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선 국사가 하루 밤낮에 천불천탑을 지었다는 운주사雲舟寺 창건설화처럼, 달나라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었던 시대에나 있음직한 이야기들이 많다.

근래 들어 하나의 가설은 한편의 논문이 되고, 논문은 석불의 개수만큼이나 많아졌다. 칠성바위를 근거로 칠성신앙을 중시했던 도교사원이라는 주장, 티베트의 영향을 받은 밀교사원이라는 추측, 능주의 호족들이 세력 확산을 꾀하며 창건했다는 주장, 몽골의 고려 침략 때 끌려온 거란족들이 귀향의 소망을 담아 건립했다는 주장, 천민과 노비들의 코뮌이며 혁명사상을 믿고 미륵공동체를 열었다는 주장, 와불이 일어서면 운주사가 한반도의 수도가 된다는 주장 등등. 혹은 그럴 법하고, 혹은 실소가 나오는 이야기들이 생멸하는, 운주사는 상상의 보물창고다.

ⓒ월간 불광 제공

주지, 정행 스님은 이랬을까, 저랬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가는 곳이 운주사라고 했다.

“높은 벼슬아치가 금 얼마를 내어 왕실과 가문의 안녕을 빌었다는 그 흔한 사적기가 여기는 없어요. 그것이 다행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르지만, 만약 기록이 있었다면 사람들은 그것에 머물고 말았을 거라. 누가 어떤 이유로 천불천탑을 건립했다고 적어 놓았다면, 그건 운주사가 아니지. 생각은 지식으로 제한돼 버리고, 상상으로 피어날 수 없었을 거요. 불법이 그래요, 외길이 아니라, 산에 오를 때 이 길로도 가고, 저 길로도 가고 그러는 거라.”

기록이 없으니 걸림이 없다. 관념에서 벗어나 마음껏 상상하고, 누구나 한세상을 그려볼 수 있는 곳. “그래서 운주사는 스토리텔링의 보고가 되지 않았느냐.”는 스님의 말은 즐거운 역설이다.

ⓒ월간 불광 제공

“와불이 누워 있습니까? 앉아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스님이 웃는다. 와불은 늘 부부처럼 보였다. 초야를 치르기 위해 나란히 누워 별 바라기를 하고 있는 모습.

인간의 원초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실 와불臥佛은 좌불坐佛이다. 와불은 원래 세 개였다. 넓고 평평한 바위를 삼등분 하여, 중앙에 본존불을, 양쪽에 협시불을 양각했다. 오른쪽 것은 떼어내 바로 아래쪽에 세웠다.

두 개 와불 중에 신랑처럼 큰 것이 본존불이고, 신부처럼 작은 것이 협시불이다. 본존불은 지권인을 취한 가부좌 자세다. 그러니까 본존불은 앉아 있고 협시불은 서 있는 형상인데, 떼어 일으켜 세우지 못해 누워 있는 것이다. 정확한 이름은 ‘와형석조여래불臥形石造如來佛’이고 일명 ‘와불臥佛’이다. 와불은 200t이 넘어 당시 기술로는 세우기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진짜 와불은 오른손을 괴고 모로 누워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밤새 비가 내렸다. 저 비를 맞고, 들에 나물과 보리밭의 푸른 싹들이 막 올라올 것이므로, 봄비라고 불러도 좋을 비다. 비는 예불 올릴 즈음에 가늘어지다가 곧 그쳤다. 나뭇가지에 빗방울이 맺힌 새벽 산사는 맑고 고요했다.

그런 시간에 절 마당을 느릿느릿 걷는 일은 저녁에 술 한 잔 나누는 즐거움보다 먼저다. 칠층석탑 쪽에 옅은 안개가 끼었다. 여명은 서서히 밝아오고, 안개는 계곡을 타고 올라왔다. 우리는 북쪽 불사바위를 향해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천불천탑 불사를 지휘했다는 마애불의 위쪽, S자 지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월간 불광 제공

운주사의 전경과 멀리 운무가 자욱하게 낀 산야의 풍경은 신들의 세상처럼 보였다. 운무가 계곡을 따라 퍼지면서 석탑과 불상들을 숨겨 주듯이 감싸 안은 모습은, 그야말로 운주사雲住寺였다.

내려가는 길에 만난 원구형圓球形 석탑. 밥그릇을 쌓아 놓은 독특한 모습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다. 1910년대 사진에는 7층인데 지금은 4층이다. 운주사 탑은 초입 구층석탑에서 여기까지 20여기가 남아 있다.

정림사지 석탑처럼 지붕돌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가 말려 올라간 백제형 탑도 있고, 감은사지 석탑처럼 지붕돌이 육중하고 경사가 급한 신라형 석탑도 있다. 석조불감 앞에는 호떡을 포개 놓은 듯한 원형석탑이 서 있다. 탑의 지붕돌이 사각 방형方形에서 둥근 원형圓形으로 바뀐 것이다. 더 올라가면 그것이 구형으로 나타난다.

탑은 한 층이 집처럼, 지붕돌과 몸돌로 쌓아 올라가는데, 원구형은 지붕과 몸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탑은 사각형에서 원판형으로, 다시 원구형으로, 직선은 곡선이 되고, 곡선은 원이 되고, 원圓은 구球로 변화하는 것이다.

달덩이 같은 탑신을 쌓아 올라간다는 것, 그것은 정형을 무너뜨린 파격이고, 걸림이 없는 자유로움이다. 둥근 것, 그것은 원융圓融한 세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월간 불광 제공

신비로운 운주사에서 분명한 것은 동시대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천불천탑은 귀족불교였던 고려의 찬란하고 정교한 아름다움과 확연히 구분된다. 투박하고, 못나고, 단순하고, 볼품도 없고, 장식도 없고, 위엄도 없는, 하지만 그래서 고향처럼 정겹고 반가운 돌의 형상들.

거기서 공통으로 읽히는 것은 하나의 열망이다. 시대의 권력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고, 시대의 부조리를 변혁시키고 싶은 희망처럼 그렇게 커다란 것이었는지, 민중의 삶을 좀 나아지게 하고,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비는 소박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변방의 집단적 열망이 거기 충만했을 것이라는 느낌은 전해져 온다.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오랜 세월 동안 거기 머물게 하면서 돌을 깎고 갈고 세우는 그 힘든 일을 기꺼이 하지 않으면 안 되게 했을까?

그러다가 어느 날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문득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그들의 열망은 혹시나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들 가슴마다에 달려 있는 세월호의 노란 리본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상상으로 가득한 운주사의 이야기 바구니에 작은 조각 하나를 보탠다.

** 이광이는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다.

** 윗 글은 월간<불광>에 연재 중인 <이광이의 절집 방랑기>를 출판사와 필자의 허락을 받고 재게재한 것 입니다. (www.bulkw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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