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에서 일하다 독립운동가로 나선 이봉창 의사의 생애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위당 정인보 선생이 노랫말을 쓴 광복절 노래의 첫 소절이다.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은 모든 사람이 거리로 몰려나와 환호하고 춤추며 만세를 불렀다. 사람이 춤을 추니 바닷물도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 <태극기 앞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결의를 다지는 이봉창 의사>‘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이봉창 열사가 거사 한 달을 앞둔 1931년 12월 13일, 선서문을 가슴에 붙이고 찍은 사진.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낙생이 찍었다.

그날의 감격이 있은 지 올해 71년을 맞는다. 세월이 흐르면 기쁨도 기억도 희미해지는가, 요즘 갈수록 광복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우리가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오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애국지사와 호국영령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중에 철도출신 독립운동가도 있다. 바로 이봉창 의사이다.

1932년 1월 8일 일본의 도쿄 요요기 연병장.

히로히토 일왕이 참석한 가운데 신년 관병식이 열렸다. 식장에 모여든 군중들은 최근 만주를 점령하며 욱일승천의 기세를 자랑하는 일본군의 위용에 열띤 환호성을 질렀다.

관병식이 끝나자 히로히토는 수행원들과 함께 마차에 올라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히로히토 일행의 마차 행렬이 도쿄 경시청 앞에 접어들 때였다. 군중 틈에서 갑자기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며 일왕을 뒤따르던 궁내대신의 마차가 뒤집혔다. 수행원들과 마차를 끌던 말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일왕은 무사했다. 아수라장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히로히토는 허겁지겁 현장을 빠져나갔다.

깜짝 놀란 일본 경찰들이 급히 현장을 봉쇄하고 대대적인 범인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면 무조건 구타해 체포했다. 이때 말쑥한 차림의 신사가 폭행을 말리면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수했다.

그가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의 독립투사 이봉창이었다.

일왕을 겨냥해 도쿄 한복판에서 수류탄을 터뜨린 이봉창 의사

일왕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이유는 수류탄이 궁내대신의 마차를 잘못 맞췄기 때문이었다. 줄지어 가는 마차 가운데, 일왕이 탄 마차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탓이었다.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일본 제국주의 원흉을 향한 이봉창 의사의 일격은 비록 실패했지만, 잠들어있던 조선의 독립의지를 일깨웠다. 뿐만 아니라 그의 거사에 감동한 중국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당시 침체돼 있던 임시정부의 활동에 활로를 틔워 주었다.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이봉창 의사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철도직원으로 근무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 <효창공원에 있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의 묘>이봉창 의사의 유해는 해방 후 일본에서 결성된 ‘재동경 순국열사 유골봉환회’가 일본 각지의 형무소 묘지를 찾아 수습해 1946년 국내로 봉환했다. 당시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국내로 송환된 이 의사의 유골은 서울의 태고사(현 조계사)에 봉안됐으며, 이후 ‘3열사 봉장위원회’가 구성돼 전 국민의 애도 속에 그해 7월 국민장을 치르고,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치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봉창 의사의 묘이다.ⓒ코레일 정연승 기자

이봉창 의사는 1900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이진규(李鎭奎)선생은 원래 고향인 전라도에서 농업에 종사했으나, 농토가 철도건설 계획지점 인근에 있다는 이유로 일제에 토지를 빼앗겨 생계를 꾸려나갈 길이 없자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토지를 강제수용하거나 헐값에 매입해 전국의 철도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이 전답과 가옥을 잃고 고통을 받았는데, 이봉창 의사의 집안도 일제의 토지강제수용의 피해자였다. 가세가 넉넉지 않았던 그는 문창보통학교(현 효창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의 점원이 되었다가 19세의 나이에 철도에 입사한다.

이봉창 의사가 철도에 첫 발을 디딘 곳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용산철도국 용산기관구였다. 지금으로 치면 용산기관차 승무사업소가 되겠고, 위치는 과거 용산철도차량정비단 자리다. 철도 공사가 이곳을 국제 업무지구로 조성하려다 여의치 않아 현재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곳인데, 청년 이봉창은 용산기관구에서 운전견습생으로 철도생활을 시작했다.

용산기관구에서 운전견습생으로 일했던 청년 이봉창

▲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있는 이봉창 의사의 동상. ⓒ코레일 정연승 기자

청년 이봉창이 철도에 들어오게 된 동기는 뚜렷이 밝혀진 바가 없다. 그의 옥중수기엔 차별받는 조선청년으로서 일제에 저항해 조국광복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을 뿐 철도에 입사한 이유나 그곳에서의 생활은 자세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당시 철도는 괜찮은 직장이었고, 일정한 급여가 꼬박꼬박 지급되었으므로 가난한 도시청년이 호구지책으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의 일터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신입사원, 그것도 조선인 이봉창이 철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장 초보적인 운전견습생이었다. 당시 운전견습생은 지금의 부기관사가 아니고, 투탄실습을 하면서 운행을 앞둔 증기기관차에 불을 붙이는 정도의 일을 했던 맨 말단의 직책이다.

때마침 이봉창이 근무하던 1920년대의 조선 철도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다.

당시 조선의 철도는 만주 하얼빈에 본사를 둔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일제는 이 회사를 통해 조선의 철도를 위탁경영했다. 그러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조선인의 철도원 등용을 극도로 제한했다. 그나마 등용된 조선인도 차별했음은 물론이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자료에 따르면 조선인은 정원의 3분의 1에 불과했으며, 급여는 일본인의 52퍼센트 수준이었다.

게다가 고위직은 한 명도 없고 현재 5급 공무원에 해당하는 주임관이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사정이 이런 까닭에 조선인이 철도기술과 경영을 배우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다. 청년 이봉창이 불과 4년 만에 철도를 그만두고 독립운동가의 길을 가게 된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추측되는 대목이다.

이것은 마하트마 간디가 기차를 타고 가다 인도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민족의식에 눈떠 훗날 독립운동가의 길로 들어선 예와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 선생을 만나고 거사를 결심하다

용산기관구에서 약 4년을 근무하던 청년 이봉창은 갑자기 퇴직을 결심한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여자와 마작에 빠져 빚을 지고, 그로 인해 채권자들로부터 협박을 받자 사표를 내고 퇴직금으로 채무문제를 해결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그가 4년이 넘도록 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조선인이란 이유로 차별받는 직장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퇴직 이유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철도를 그만 둔 이봉창이 일본으로 건너가 겪은 차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는 1928년 11월, 히로히토 일왕의 즉위식을 보려고 교토에 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어 열흘 동안이나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에 분개한 이봉창은 중국 상하이로 달려가 김구선생을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마침내 1932년 1월 8일 도쿄 한 복판에서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다.

▲ 대전 현충원 호국철도 기념관에 전시돼있는 이봉창 의사의 사진. ⓒ코레일 박민형 기자

이봉창이 의열투쟁의 대상으로 일왕을 선택한 이유는 일왕이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이었으며, 모든 침략 전쟁이 그의 명령으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메이지일왕 이래 한국이나 중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과 만행의 책임은 일왕에게 있었다.

그러므로 이봉창의 거사는 식민지 지배와 수탈의 최정점에 있는 당사자를 척살하여 인류의 양심을 수호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려 했던 의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봉창의 거사가 조선은 물론 모든 아시아인들을 놀라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일왕을 저격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한말 유학자 송상도는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기려수필(騎驢隨筆)에서 이봉창을 진시황을 저격했던 창해역사(滄海力士)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봉창 의사에 대한 첫 공판은 1932년 9월 16일 도쿄 대법원에서 열렸다. 이후 몇 차례의 형식적인 공판이 이어진 끝에 9월 30일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로부터 불과 열흘 뒤인 10월 10일 이 의사는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결국 순국했다.

광복절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날로써, 올해 일흔한 돌을 맞았다. 사드를 둘러싼 갈등이 주변국은 물론 우리 안에서조차 시끄러운 요즘, 이봉창 의사는 철도출신이기에 끊긴 남북의 철도가 다시 이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 손민두 코레일 KTX기장은 광주 출신으로 1985년에 철도청에 들어가 2004년 4월1일 경부고속철도 개통 첫 열차를 운행하고 무사고 2백만 킬로미터를 달성한 베테랑 기장이다.

틈틈이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기자로 활동하면서 KTX객실기내지 <KTX매거진>에 기차와 인문학이 만나는 칼럼 '기차이야기'를 3년간 연재하며 기차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광주in>은 손 기장이 그동안 잡지와 사보에 연재했던 글과 새 글을 부정기 연재한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