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8일 토요일 이른 아침, 전남 장성군 남면 시목마을에 이르렀다. 하지가 내일 모레, 새벽이지만 밝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가는 길은 아직 어둡다. 비가 올 것만 같은 우울한 날씨다. 그런데 안개가 끼어 오늘 날씨는 ‘맑음’을 예고하니, 종잡을 수 없다. 오늘 사람들이 모여 논에 손모심기를 한다.

모내기를 하는 날이면 학교에 가는 대신 못줄을 잡아야 했다. 가난한 시절이었고 품 하나가 아쉬운 때였으니까. 모심기를 할 즈음이 되었을 때는 학교 때문에 광주로 와야 했다. 해서 손모내기를 직접 해보고 싶은 열망이 있으나 하루 노동으로 찐하게 모를 심어본 기억은 없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오늘 만나는 사람들의 하루를 스케치하러 가는 길이니까.

시목마을 앞(지번은 분향마을에 속함) 논에서는 06:00부터 1차, 14:00부터 2차, 두 차례에 걸쳐 모내기가 진행된다. 왜 두 차례로 나눠서 할까? 06:00 신청자와 14:00 신청자가 다른 것일까? 분향노인정 앞 빈 공간에 주차하고 오늘의 작업장으로 가는 길에 의문은 풀렸다.

오늘 행사에서 작업반장 역할을 맡았다는, 광주 노무현시민학교 교장인 김용태 선생(그는 현직 교사이도 하다), 짧은 거리이지만 짐 때문에 운행한다는 승용차 안에서 그가 덧붙인 설명 덕분이다. 오늘 행사는 <2016 노짱 캐릭터논 손 모심기>다. 노무현재단 광주지역위원회가 주관하는 행사명이니 딴지를 걸지 않겠으나 논에 새길 글자를 생각하면 2%쯤 담아내지 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오늘 우리가 모심기를 할 논 주인은 이 마을(시목마을) 주민 구재상 님(62)이다.

자원봉사를 자처한 이들과 행사 진행자를 포함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호남고속도로 끝자락을 관통하는 굴다리를 지나 들녘으로 나간다. 우리는 오늘 1300평의 논에 [깨][어][있][는][시][민]/[행][동][하][는][양][심], 이렇게 열두 글자를 새길 것이다. 서체가 고딕이었다면 여느 모내기 현장처럼 이양기로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될 일인데, 신동욱 작가의 캘리그라피(작품)를 사각 프레임의 논에 구현해야 하니, 결코 쉬울 수가 없다.

#001-1

그런데 왜 오늘 우리가 이곳 장성에서 벼라는 작물의 작기가 끝날 즈음에야 완성되는 작품을 만드는 퍼포먼스를 하는 걸까? 논 주인 구재상 님에 대한 예습이 필요하다. 그는 2009년 <사랑합니다, 바보 대통령>이란 문구를 자신의 논에 새겨 화제가 된 농민이다. 그렇다고 그가 농지에 재배하는 작물로 수를 놓아 메시지(이미지)를 전달하는 퍼포먼스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행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방식으로 고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는 일을 처음 행한 사람이다. 대통령이 서거한 바로 그 해에 주위에 알리지 않고 나름의 추모 방식을 택한 것, 해서 그 울림은 더욱 컸다. 이후 구 씨의 추모 방식은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이 이어받아 해마다 조금씩 다른 추모 이미지를 논에 새기고 있다. 올해도 봉하마을에서는 일주일 전에 그러한 작업을 마친 상태다.

#001-2

▲ 2009년 구재상 씨가 자신의 논에 쓴 글씨. ⓒ<장성닷컴>

노 전 대통령은 2009년 5월 23일에 서거했다. 향년 62세. 장성군 남면 분향리 주민 구재상은 자신만의 특별한 추모를 기획한다. 자신의 논 4440㎡에 대통령을 추모하는 글씨를 새기기로 결심한 것. 새길 글귀는 <사랑합니다 ♡바보대통령 그립습니다 바보농민>이다. 이런 결심은 가족들에게만 알린 상태로, 글씨 도안은 미대를 졸업한 딸이 맡았다. 대략 가로100m, 세로43m의 논이 거대한 캔버스가 된 것. 바탕에는 황금누리벼를 심고, 글씨는 녹원찰벼(녹색쌀)를 심는(새기는) 방식이었다.

그해 6월 중순부터 15일 동안, 일부는 이앙기로 일부는 손으로 심었다. 그리고 4-5일에 걸쳐 보식(補植)과 보정(글씨 수정)을 하는데, 모두 20여 일이 흘렀다. 처음 하는 일, 여럿이 하면 모가 섞이는 등 혼선도 있어, 혼자서 한 땀 한 땀 수놓듯 작업했다. 수확기가 가까워지자 글씨가 드러났다. 논은 호남고속도로 하행선을 타고, 한국도로공사 광주영업소에 이른 차량에 탄 사람이라면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하늘나라의 대통령이 보셨으면 하는 간절함으로 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수확기가 코앞인 10월 초순, 장성군의 한 신문사(장성닷컴) 기자가 보도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진다. 당시 보도에서, 구씨는 “노사모가 아니고, 노 전 대통령을 만난 적도 없거니와 서거 때 추모 행사나 분향소에도 가지 않은 평범한 농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날이후 구재상 님 별명은 ‘바보농민’이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대통령 서거 7주기를 맞이한 2016년, 6월 18일, 아침 6시부터 ‘바보농민’의 (바로 그) 논 입구에는 스물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3일 전부터 논 주인과 김용태 님 등 서너 분이 밑그림으로 그려놓은 글씨를 손모심기로 새기기 위해서다. 붓글씨 한 자 한 자를 벼 모종을 심어 테두리를 만들어 놓은 상태, 그 안에 흑미를 일정한 간격으로 심으면 오전 일과는 끝난다.

#001-3.

▲ 봉하마을에서 온 촬영팀이 드론을 띄워 촬영한 동영상 화면. 보정을 거쳐 글씨가 보이도록 했다. 위에는 시민의 ‘민’이, 아래에는 양심의 ‘심‘이 뚜렷하게 보인다.

금세 끝날 것이라는 예상은 뒤집어졌다. 글자당 한 명씩 12명이 투입된 작업은 9시30분쯤에야 끝났다. 일행들은 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시목노인정 앞 정자에서 긴 휴식에 들어간다. 먹고 마시고 노는 일. 오후 두 시부터는 (봉하마을 등 멀리서 오는 참가자들과 함께) 오전에 흑미로 새긴 글씨 바깥(여백)에 (익었을 때) 색깔 차가 분명한 해품벼를 심을 예정이다. 5시간에 가까운 휴식 시간, 길다.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지나간다. 행사를 주관하는 광주 노무현재단에서 준비한 김밥과 어묵으로 새참을 먹고, 수육과 김치 등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눈다.

그 사이, 필자와 동행인 후배, 멀리 마산에서 온 지인 셋은 행사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곳을 다녀오기로 결의한다. 사실 시목마을의 여정을 살피면서 꼭 한번 들러보리라 작정한 곳이 있었다. 필암서원(하서 김인후를 기리는)은 너무 멀리 있고, 월봉서원(기대승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은 가깝지만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를 것이 분명하고…….

#002.

해마다 5월이 오면 제창이냐 합창이냐, 지정곡이나 기념곡이냐 논란의 중심에 놓이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의 생가(윤상원·박기순 열사 자료전시관)를 찾아간다. 지난 5월 18일 국립묘지에서 행사를 마치고 일행들과 함께 구묘역으로 가던 문재인 전 대표는, 이런 논란이 아직도 진행된다는 그 자체가 문제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옳으신 말씀이다.

한동안 광산구에 살았던 필자에게도 이곳 방문은 처음이다. 목포와 마산에서 온 두 사람도 마찬가지란다. 오전에 마산에서 온 지인은 12자 중 ‘행동하는 양심’의 ‘동’ 자를, 목포에서 온 후배는 ‘심’자를 새겼다. 움직일 동(動)과 마음 심(心)이라, 순식간에 의기투합해서 움직이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나 보다. 승용차를 타고 우리는 윤상원-박기순 커플을 만나러 간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셋 가운데 나는 무엇인가를 위해 저버린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자동차(自動車) 안에서 마음은 저 혼자 움직인다.

#003.

장성 시목마을에서 11.7km를 달려 도착했다. 20분소요, 그러나 마음속으로만 한 번 가야지 하던 세월에 비하면 너무나 빨리 왔다. 너무 가까이에 윤상원 열사의 마을이 있다. 모래와 시멘트와 물로 빚어낸 집들, 지은 지 사오 십 년은 족히 넘었을 듯한 건물들과 축성한 블록 담들이 보이는 풍경, 도시에서는 대부분이 재개발 대상이거나 아파트로의 변모를 피한 곳이라면 리모델링을 통하는 도시재생공사의 대상이 되는 집들이다. 그런 도심의 골목에서 간혹 만나는 벽화들이 이 마을에도 있다. 윤상원 열사의 모습도 보인다.

#004-1. #004-2. #004-3.

마을 공터 한 쪽에 창고 건물. 나무 판을 써서 건물의 창(窓)을 막은 모양이다. 게시판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피니 그러하다. 처음에는 보기에 그래서 페인트로 칠한 모양인데, 세파에 시달리는 우리네 삶처럼 사각 프레임 속 흔적들은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주변 소품들을 제거하면 한 점의 추상화 같고, 해변의 바위에서 부서지는 파도를 담은 구상화 같기도 하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열사의 호는 ‘해파’였다. 그래서 지금은 전시관으로 꾸민 열사가 쓰던 사랑채 건물에는 [海波齋]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옛 전남 도청 건물 벽에 아로새겨진 총탄 자욱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암튼, 따로 그리는 벽화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나는 ‘지금 이대로’를 화랑에 게시된 한 점의 그림처럼 받아들인다.

#005-1. #005-2.

보통은 ‘시대의 등불’이라고 하는데, 윤상원·박기순 열사는 ‘시대의 들불’이라고 하는 것일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곳을 답사하는 이들이 자료를 꼼꼼하게 읽었나를 가늠해보는 질문으로 좋지 않을까?

#006.

이정표를 따라 걷는 골목길, 개 짖는 소리에 담을 넘겨다보니 개 한 마리가 짖고 있다. 집 마당과 뒤안 곳곳에 가득 피어난 망초 꽃들, 빈집이 분명하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망초는 대부분이 개망초이고, 지천에 피어 있는 꽃은 개망초이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우리 삶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 앞에는 ‘개’자를 붙이거니와 개망초도 예외는 아니다. 누군가 밥을 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어쨌든 빈 집은 한 마리의 개(犬)와 그 이름을 문신처럼 붙이고 살아가는 개망초들이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007-1. #007-2.

한 출판사로부터 신간이 도착했다. ‘서평을 써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 ‘일단 읽어보고’ 읽히지 않으면 서평도 없다. 읽다보니 다가오는 구절이 있다.

<자기 인생에 마음이 들지 않거나 삶이 풀리지 않을 때면 늘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거지?“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그 답을 찾으려고 애써왔다. 하르트무트 폰헨티히는 지적인 사람이란 ”해야 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무엇이 삶을 예술로 만드는가』(프랑크 베르츠바흐, 불광출판사)

해야 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 열사 윤상원의 젊은 날의 고뇌를 엿본다(007-1). 누군가 내가 가야만 하는 길을, 이처럼 표시해주면(007-2), 행복할까?

#008.

대문이 닫혀 있다. 담장 너머로 집 안을 살핀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 알림판 하나가 건물 벽에 걸려 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 41번지. 대문을 열고 생가에 들어간다. 대낮이라서 그런가, 마을에 들어선 이후 단 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생가 안에도 인기척이 없다. 마당 한가운데에 갓 수확한 자색 양파가 널려 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이지만 분단 상황에서는 섬나라와 다를 바 없다. 문득 양파들이 널린 모양이 허리 잘린 한반도 남쪽 지도 같다고 생각한다. 자색 양파에 대한 너무 자의적인 해석?

80년 5월 광주는 사실상 섬나라인 나라 안에서도 고립된 섬이었다. 윤상원 열사는 5.18항쟁이 일어나자 들불야학 강학들과 함께 항쟁당시 유일한 매체였던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한다. 또한 일부의 무기반납주장에 반대하며 항쟁지도부를 규합했다.

<(당시)항쟁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던 윤상원은 1980년 5월 26일 마지막 외신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에 대해 당시 한 외신기자는 '매우 인상 깊은 눈빛을 가진 청년'이라고 소회한 바 있다.>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자료

고립된 상황에서 <투사회보>가 광주 안 시민들에게 참상을 알리는 매체였다면, 외신 기자들은 나라 밖으로 그러한 참상을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 5월 18일 오후에는 5·18 당시 외신기자들이 이곳을 찾아 열사를 추모하고 유가족들을 만난 바 있다. 그들은 5월 16일 위르겐 힌츠페터 추모식과 외신기자 기자회견 등에 참여했으며, 5월 17일에는 전야제에도 참석했다.

5월 16일 기자회견에서 19년 만에 광주를 다시 찾은 브래들리 마틴(5·18 당시 옛 전남도청에서의 최후항쟁까지 윤상원 열사를 취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은 회상했다. “윤 열사와 그의 동료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발포가 있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한 그들은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라고(<민중의 소리> 5.19.).
갓 수확한 양파를 일시적으로 말리는 것은 썩히지 않고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다. 자색 양파들이 만든 ‘묘한’ 지도를 보며 생각한다. 광주는 어디쯤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걸까?

#009-1. #009-2.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영혼결혼식으로 하나가 된 부부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추모비, 하단에 한 공기의 밥과 총이 그려져 있다(009-1). 마당에도 민들레꽃 두 송이가 정답게 서서 ‘사랑을 향한 꽃을 피워주세요!’라고 속삭이며 사진의 배경이 된다(009-2.). 총은 알겠는데 왜 밥일까, 하는 생각은 그만. 앞서 만난 개망초 꽃과 겹치면서 시 하나로 이어진다. 광주의 한 신문사에 근무하는 대학 동기가 지인이 낸 책이라고 준 시집이었을 게다.

여수가 고향인 시인의 아버지는 배 선장이었다. 국어 선생이기도 한 김미순의 시에는 아버지, 어머니의 그림자가 유난히 많다. 개망초를 풍년대라고 부르던 것을 상기시켜 준 시다. 절대적인 빈곤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 해법 적용에서 우리 현대사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그늘은 그렇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개망초1

콩밭 고랑 들어앉은 흰 구름/ 망연히 바라본 언덕빼기//
널브러진 흙내에 한낮이 기울고/ 어머니 한숨으로 네 이름을 부른다/
풍년대/ 굶주리고 헐벗은 엄정한 가난의 시절/
목메인 기원으로 붙여진 네 이름/ 풍년대라 기억하는/ 어머니의 꽃.

-김미순 시집 『아주 가끔』에서 (도서출판 소리기획, 2016.4.)

#010-1. #010-2.

쉬는 시간에 짬을 내어 온 여정, 그럼에도 일행들의 마음은 바쁜 것 같다. 해서 ‘해파재’(열사가 사용하던 사랑채) 안에 있는 기록들은 살필 시간이 없다. 대신 추모비 옆에 입간판에 새겨진 내용들을 하나하나 살핀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가 적혀 있고, 5.18광주항쟁 당시의 일지가 열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세 번째 입간판이 이상하다.

다가가보니 전시물 자체가 거울이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윤상원, 박기순 열사가 꿈꾸던 더불어 함께 사는 대동세상 우리는 지금, 함께 가고 있는가?’ ‘더불어’와 ‘함께’는 유의어다. 의미의 중첩이지만 강조로 받아들인다. 대동세상(大同世上)이란 사자성어 아닌 네 음절의 말이 가슴을 후빈다. ‘대동’은 “1)비슷비슷한, 2)큰 세력이 하나로 합함. 3)온 세상에 번영하여 화평하게 됨.”을 의미한다. 1)의 의미는 처지나 성격이 비슷비슷하다는 식으로 쓰인다.

다름을 틀림으로 읽고, 알면서도 그러한 프레임을 짜고, 그 차이를 부각하는 동안 고만고만한 세력들은 하나, 한 목적을 위해 뭉칠 수 없다. 그 결과 온 세상이 번영하여 화평하게 되는 바람을 이룰 수가 없다. ‘흐릿한 80년 5월의 거울’ 앞에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세요. ‘물음을 던져’ 보세요.

오늘 우리 일행들이 1300평 논에 새기고 있는 ‘깨어 있는 시민’(노무현)과 ‘행동하는 양심’(김대중)은 상보(相補) 관계에 있음을, 본래 그러했는데, 민심과 표심이 쪼개지고 난 지금에야 본래 그러했음을 환기(喚起)하는 것 아니겠는가! 오후에는 열두 글자를 두드러지게 할 배경에 모를 심을 예정이다. 단순한 농사체험일 수가 없다. 시인 서정주가 노래한 누님처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면…….

#010-3.

▲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한국한서정주가 지은 시. 4연 13행의 자유시로 서정주의 대표작. 1947년 1월 9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되었다.

이 시는 국화를 소재로 계절로는 봄, 여름, 가을까지 걸쳐져 있다. 그러나 그 동안 결코 녹록치 않은 겨울들이 오고가고를 하였을 것이다. ‘세상(世上)’은 ‘한 사람이 살고 있는 동안’을 의미한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사람 서정주의 세상에도 오점은 있었다. 그러나 빼어난 서정시의 달인 서정주는 우리 문학계의 자산이다. 한 논자는 ‘국화’는 “괴로움과 혼돈이 꽃피는 고요에로 거두어들여진 화해의 순간을 상징하는 꽃”이라고 했다.

#011.

열사의 집을 나오려다, 본채 옆에서 단란한 한때를 즐기는 집고양이 가족을 만난다. 새끼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다. 젖을 물고 있는 아기 고양이로 보아 엄마 고양이는 알겠는데 아빠는? 족보 탐색은 이제 그만! 고양이를 노래한 시들이 많지만 나해철 시인의 「내 마음 속의 도둑고양이」는 언제 읽어도 절창(絶唱)이다. 군더더기 없는 명징한 시어 구사에서 오는 힘이 아닐까?

내 마음 속의 도둑고양이

밤 깊어 골목길을 오르는/ 나의 그림자에서/ 갑자기 한 뭉치 어둠이 뛰쳐나간다/ 도둑고양이/
섬찍한 도둑고양이가/ 내 가슴에서 떨어져/ 어두운 담 위로/ 쏜살같이 달려나간다/
그 곳에는 또 무엇이 있을까/ 먹을 것일까 누울 곳일까/ 바라만 볼 혁명일까/
까마득히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고 온전히 숨을 곳으로 가는/ 도둑고양이/
내 마음속의 도둑고양이/ 어두운 골목길을 오를 때/ 나보다 먼저 뛰쳐나가/ 나를 부르는 그 미운/ 버리고 싶은.

이 시는 「봉황 방실이」와 함께 <<창작과비평>> 71호(1991년 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1993년 2월에 발간된 시집 『아름다운 손』(창비시선110)에 수록되는데, 이 시집의 발문(「미운 자기와 격투하고 있는 시인」)을 김남주 시인이 썼다. 시인은 발문 끝에 이 시 전문을 소개하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버리고 싶은 미운 자기와 격투하고 있는 나해철 시인에게 창창한 앞날이 있을 것!” 시인 나해철은 성형외과 의사이기도 하다. 올해로 환갑을 맞이했는데, 1995년 시집 『긴 사랑』을 낸 이후 17년 만에 『꽃길 삼 만리』을 펴냈다. 그리고 지금은 (지난 번 글에서 잠시 소개한 바와 같이) 시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거의 날마다 한 편씩 선보이고 있다. ‘바라만 볼 혁명’이라.

#012.

늘 그렇지만 나의 동행들은 자꾸만 멈춰서거나 차를 세우는 통에 많이 답답하리라. 서둘러 집 대문을 나선, ‘행동하는 양심’ 중 ‘동(動)’자를 새긴 지인이 열사의 집 담벼락에 설치된 안내문 옆 벽에 기대어 서 있다. 그리고 한마디를 건넨다. ‘화재가 났었네요!’

윤상원 열사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2004년 12월 11일 오후 7시경 발행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때 열사의 많은 유품도 대부분 불타버렸다. 2005년 5월 22일 생가가 복원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소실과 복원 사이 몇 개월 동안 ‘우여곡절’이 있었다. 집이 불에 타고 유품들마저 사라졌지만 죽음까지 불사하지 않고 열사가 행동으로 보여준 대동세상의 꿈은 진행형으로 살아 있다. 그 꿈의 싱싱함 때문에 많이 아프다.

#013.

마을 공터로 돌아와 차에 오른다. 마을마다 한두 개쯤은 있는 정자가 이곳에도 있고, 이곳을 찾은 이들이 공연이나 행사를 할 수 있는 간이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어떠한 설명도 없이 태극기 하나만 오롯이 게양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올해 두 차례 찾은 김해 봉하마을, 화포천으로 이어지는 논들 사이의 개울에서 멀리 바라본 노 대통령의 묘역도 태극기 하나만이 부엉이바위가 있는 산을 배경으로 게양되어 있었다.

6·25전쟁 66주년을 맞아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인 광주 금남로에서 ‘호국보훈 퍼레이드’를 한단다. 여기에 향토사단인 31사단 장병 150명과 제11공수특전여단 요원 50명 등 군인 200명이 참여한다는 것, 광주시민들의 거센 저항으로 31사단은 불참을 결정했고, 보훈처는 끝내 이 계획을 취소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동안(6월 20일 밤 8시) <jtbc 뉴스룸>은 뉴스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계획이 철회되었다, 속행한다더라, 최종적으로 철회되었다. 보훈처의 오락가락 행보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014.

담장을 넘어왔으나 꿋꿋하게 드리운 가지에서 피어난 장미의 꽃들. 윤상원 열사의 마을을 떠나는 차 안에서 본 마지막 풍경이다. 수분과 영양분을 양껏 흡수한 나무라면 결코 이런 풍경을 빚어낼 수 없다. 감나무가 많아서 시목(枾木)이란 이름을 얻은 시목마을로 오후의 모심기를 하러 간다.

/사진: 곽진영 편집위원, <인문의 향연>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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