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밑까지 차오르지만, 지치진 않는다. 오늘은 연기암을 지나 노고단으로 가는 길목인 무넹기를 목표로 한다. 새해 들어 새롭게 시작한 새벽 산책. 나는 이 코스를 연기암길로 택했다. 국내에서 음이온 풍부하기로 손꼽히는 계곡인데다 지리산의 여느 계곡처럼 명경 같은 옥색의 골짜기물이 내내 길과 함께하니 다른 곳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대화엄사의 십여 곳 암자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높은 곳에 자리한 연기암은 화엄사의 원찰이다. 백제 성왕 때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꽤 괜찮은 이 길이 집에서 5분 걸리는 지근 거리이니 나도 참 복 받은 사람이다.

▲ 2014년 12월 섬진강과 지리산. ⓒ카페 <지리산과 섬진강 사람들> 갈무리(cafe.daum.net/jsdream)

걸으면서 마시는 것은 공기가 아니라 삶의 행복이다. 그저 마음에 일시로 왔다갔다 하는 행복이 아니라 행복함이 꾸준히 유지되는 것, 나는 이를 ‘행복성’이라 규정한다. 돼지꿈처럼 내게 행복성이 들어앉은 것은 이곳 구례로 내려오면서부터다. 벌써 6년차. 처음 구례 들어오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아무도 없는 미지의 땅, 이삿짐 싸 싣고 하행선 고속국도를 운전하던 핸들의 손은 왜 그리 떨리던지. 그러나 기우였다. 터 잡은 동네의 어르신들은 아들 대하듯 먹을 것, 필요한 것을 수시로 툇마루에 갖다놓아 주셨고, 먼저 내려온 귀촌 ‘선배들’은 시시콜콜 내 사연을 묻고 대안을 마련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40여 년 간의 시멘트 빛 도회의 삶에서 얻은 건 메마른 몸과 맘뿐이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동료와 경쟁해야 하는 자본주의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주어진 일을 메마르게 행하는 것 외엔 없었다. 집 마련하려 돈 빌리고 그 돈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벌어야 하는, 그 놈의 돈과 떨어져 도저히 살 수 없는 피폐한 일상. 그러니 일이 재미있고 의미를 지닐 수가 없었다.

구례? 물론 여기에서도 약간의 돈은 필요하지만 서울처럼 무지막지한 단위는 아니다. 아내에게 물어 보니 우리 다섯 식구 한 달 생활비가 근 50만 원 안팎이란다. 아이들 셋이 아직 어린 이유도 있지만, 둘러보아도 크게 돈 들어갈 데가 없다.

동네 가운데의 빈 집을 얻은지라 연세로 30만원만 주면 되고, 텃밭에서 이런저런 채소들은 내 손으로 길러 먹을 수 있으니 가게에서 사는 것은 가공식품류밖에 없다. 어지러운 세상을 방으로 들이고 싶지 않아 티비도 없앴으니 전기세도 별로 들지 않는다.

아이들의 놀이터는 자연이다. 뒷산이 큰산 지리산이고 앞강이 전국 최고로 맑은 섬진강이니 생태환경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봄이면 논두렁 밭두렁의 나물을 같이 뜯고, 연분홍의 섬진강 벚꽃길을 드라이브한다. 아, 산수유꽃으로 뒤덮인 노란 산동마을에서 바라보는 잔설 업은 노고단의 자태는 얼마나 가슴 뛰게 하는가.

여름이면 생태하천으로 탈바꿈한 서시천을 쏘다니며 물고기 잡고, 가을이면 피아골, 문수골 드나들며 홍엽을 만끽한다. 지금의 우리처럼, 아이들도 커 어른이 되면 꼭 이 시간을 기억하리라 믿으며 함께 노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전남으로 들어오기 잘했다. 이유야 어쨌든 지자체 중 개발 바람을 덜 맞은 곳이 우리 지역인데, 당시에는 ‘낙후지역’으로 낙인 찍혔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피안의 땅'이 되었으니 말이다. 여행작가라는 직업으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녀 보지만, 우리 전남만큼 자연과 어울리며 살아가는 곳이 별로 없다.
 

▲ 2014년 12월 섬진강과 지리산. ⓒ카페 <지리산과 섬진강 사람들> 갈무리(cafe.daum.net/jsdream)

선조들이나 지금의 우리나 산천초목과 함께 사는 것을 원하는 이들은 감성 타고난 예술적 기질의 사람들일 터이다. 여기 구례만 해도 글쟁이, 붓쟁이, 그림쟁이, 음악쟁이들이 발에 차인다. 구례오일장터에서 탁주 한잔 마시며 그들과 교우하는 시간은 내게 꿀맛 같다.

귀촌 혹은 귀농이라 이름 붙는 사람들은 내남 없이 생채기 하나씩은 가슴 속에 갖고 있는 이들이다. 맘의 병이든 몸의 병이든 왜곡된 자본주의를 견디다가 본의 아니게 얻게 되었다. 그들을 내 자식처럼, 내 형제처럼 보듬어 주는 우리 지역의 토박이 어르신들을 존경한다. 이 분들에게 어떻게 보은할까 고민 중이다.

섬진강 둑방에 앉아 견두산으로 넘어 가는 홍시빛 석양을 바라 본다. 하루 해가 저리 어여삐 마무리되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시인 신동엽이 말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의 뉘앙스는 좀 다르지만, 하늘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살던 과거의 삶은 이제 흘러갔다. 나의 삶도 저 석양처럼 아름답게 마무리되기를 기대한다. 여기 전남, 그리고 구례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리라.

** 윗 글은 <전남새뜸>에 게재된 것을 다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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