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 향수와 추억이 서린 옛 귀성열차

지금부터 약 백 년 전, 기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나라에 엄청난 사회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기차는 고정된 삶의 방식인 농경사회에서 이동이 자유로운 산업사회로 변화의 물꼬를 틈으로써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귀성은 고향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명절을 맞아 고향을 찾게 되면서 만들어진 산업사회의 새로운 풍속도라고 할 수 있다.

귀성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도시 유학생으로부터 시작

기차의 등장은 시간과 공간의 단축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근대도시의 출현과 새로운 노동형태를 만들어냄으로써 사람들을 도시로 불러냈다. 특히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기차가 도시로의 인구이동과 대량의 물류수송을 담당함으로써 우리 사회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커다란 변모를 겪게 되었다.

▲ KTX시대의 추석 예매.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제공

이에 따라 일자리가 많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로 사람이 몰리고, 명절이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게 되면서 귀성풍습이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귀성문화는 기차가 파생시킨 사회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차가 촉발시킨 산업사회가 귀성이란 신풍속도를 낳았기 때문이다.

귀성풍습의 시작은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대가 달라져 전통유교식 교육이 실효성을 잃게 되자 재력이 있는 부모들은 자식들을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교육기관으로 보냈다. 도시로 유학 온 학생들이 명절이나 방학마다 농촌의 고향집을 방문하면서 ‘학생귀성’이란 말이 생겨나게 됐는데, 이 ‘학생귀성’이 귀성문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귀성행렬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후부터다. 만주나 일본등지로 이주했던 해외동포가 고국으로 돌아오고 서울에 정착한 출향인사들이 설날과 추석과 같은 명절에 고향을 찾기 시작하면서 귀성행렬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를 신문에서 귀성행렬 혹은 귀성열차로 보도했다. 물론 이때도 학생들이 일반인보다 더 많았다.

일반귀성객이 학생귀성객을 추월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이것은 1960년대 이후 군사정부가 추진한 이른바 경제개발계획이 진행됨으로써 일자리가 많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의 인구집중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명절에 고향을 찾는 귀성행렬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귀성풍습이 오늘날과 같은 일반적인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차표 구하는 것부터 하늘의 별따기.

과거 귀성객을 실어 나르는 교통수단은 기차가 거의 유일했다.

지금이야 개인마다 승용차가 있고 고속도로를 비롯한 전국의 도로망이 거미줄처럼 뻗어있어 굳이 기차를 이용하지 않고도 편리하게 귀성길에 나설 수 있지만 과거엔 기차 말고는 마땅히 탈 것이 없었다.

▲ 서울역 설 예매(1982년).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제공
▲ 용산역 추석 예매(1982년).ⓒ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제공

그때는 길도 없었고 차도 귀한 시절이었다. 특히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전엔 거의 대부분의 귀성객이 기차를 이용했다. 그러다보니 고향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귀성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전쟁은 차표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정보통신기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과거엔 차표를 살 수 있는 곳이 오로지 역의 매표창구뿐이었다. 때문에 명절이 다가오면 역 창구 앞엔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당시 철도청에서는 서울역이나 용산역, 청량리역과 같이 광장이 넓은 곳에 임시로 매표소를 만들어 승차권을 예매했는데,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며칠 전부터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밤을 새우기도 했다. 특히 예매 당일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매서운 겨울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고향에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렸다.

그럼에도 이따금씩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어 경찰과 공무원들이 곤봉이나 장대를 들고 사람들을 통제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한 TV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단골장면이기도 하다.

혼잡한 플렛폼에서 압사사고가 발생하기도

어렵사리 차표를 구했지만 차표가 있다고 해서 편하게 기차를 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든 정거장 플렛폼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특히 좌석지정이 되지 않는 완행열차는 콩나물시루나 다름없었다. 만원으로 표가 있어도 기차에 오를 수 없던 승객들은 기차의 창문을 통해 객차 안으로 들어갔다.

▲ 추석 귀성객(1969년).ⓒ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제공

이마저도 탈 수 없었던 사람들은 기관차를 향해 우르르 몰려오기도 했다. 명절이면 기관사들까지 플랫폼으로 달려가 승무원들과 함께 사람들을 창문으로 밀어 넣었고, 승객이 기관차에 타고 내려간 적도 많았다. 그리하여 해마다 설날과 추석이면 정원의 세 배가 넘는 승객들로 인해 열차 바퀴의 스프링이 부러졌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귀성열차와 관련하여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1960년 1월 26일 일어난 ‘서울역 압사사고’이다. 설날을 앞두고 밤 10시 50분 출발하는 서울발 목포행 완행열차가 출발 5분을 남기고 개표를 시작하자 승객들이 서로 먼저 좌석을 차지하려고 뛰는 바람에 계단에서 넘어져 31명이 압사하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은 참사가 발생했다. 1970년대에도 이러한 사고가 여러 번 있었다. 모두 좌석을 지정하지 않는 완행열차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승객들이 좌석을 차지하려고 앞 다퉈 달려간 가장 큰 이유는 기차의 운행시간이 지금보다 몇 배가 길었기 때문이다. 1972년 당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완행열차의 경우, 무려 10시간 35분, 목포까지는 11시간이나 걸렸다.

만약 승객이 자리를 잡지하지 못하면 그 길고 긴 시간을 서서가야 했기 때문에 좌석 확보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자리가 없는 사람들은 객차의 화장실까지 점령했으며 출입문 난간에 매달리거나 심지어 물건을 올려놓는 선반에 올라앉기도 했다.

플랫폼에서 허겁지겁 먹던 가락국수. 귀성열차의 색다른 별미

이렇게 어렵게 기차에 오른 승객들로 가득 찬 기차였지만 그래도 기차 안에는 여행이 주는 정겨운 낭만이 있었다. 저마다 고향에 간다는 설레임과 기쁨을 간직한 승객들은 비좁고 불편한 가운데서도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지루한 시간을 달랬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차에서 먹는 간식이다. 아마 기차하면, 추억의 삶은 달걀과 사이다가 떠오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여행에 지친 승객들은 만원으로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기차 안을 용케 드나들던 홍익회 판매원 덕분에 여행이 주는 먹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 서울역 추석 예매(1979년).ⓒ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제공

뿐만 아니라 대전이나 익산역 등 주요 역 플렛폼에서 팔던 가락국수는 고단한 여행으로 허기진 귀성객의 배를 채워 주던 추억의 먹을 거리였다. 승객들은 잠깐의 정차시간을 이용해 허겁지겁 국수를 먹다 자칫 열차를 놓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기차는 귀성객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고향 가는 길의 다정한 동반자였다. 사람들은 귀성열차를 타고 내려간 고향에서 고된 도시생활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새 힘을 얻었다. 그리고 고향에서 충전한 에너지를 갖고 다시 도시로 돌아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날렵하고 세련된 외양을 가진 KTX가 빠른 속도로 전국을 누비는 현대사회에서 과거 옹색하고 불편하던 귀성열차의 기억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지금은 추위에 떨며 차표를 구하는 일도 없고 과거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쾌적하고 빠른 KTX를 타고 고향 가는 길을 즐기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결코 즐겁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옛 귀성열차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금 우리가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TIP-1 옛날 귀성열차의 요금은 얼마였을까

지금부터 39년 전인 1977년 서울~부산 간 새마을호 요금이 4.190원, 특급열차인 통일호가 2.170원이었다. 그런데 완행열차인 비둘기호는 930원에 불과했다.

이처럼 요금이 저렴했기 때문에 속도가 늦고 좌석지정도 되지 않은 완행열차에 승객이 몰렸다. 서울역 압사사고 이후 완행열차도 좌석지정을 하게 되나 1993년 ‘철도경영개선책’의 일환으로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TIP-2 열차 내 상품판매의 역사

고된 귀성길의 허기를 달래주고 먹는 재미까지 선사해 주었던 열차 내 간식거리. 우리나라 철도에서 상품판매를 시작한 것은 언제 부터일까?

기록에 의하면 1908년으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본격적인 영업은 1930년대부터이다. 그러나 이때는 열차의 전 구간에서 서비스를 제공한 것이 아니고 대개 식사시간에 맞춰 구간구간 나누어 상품을 팔았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은 도시락이며, 다음으로 소주와 맥주 등 술과 오징어와 땅콩으로 대표되는 안주류이다. 열차에서 팔리던 상품도 시대변화에 따라 변천을 거듭했다.

나라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의 입맛이 서구화되면서 계란과 사이다로 대표되던 열차 내 간식거리가 카스테라와 우유로 바뀌었고, 지금은 호두과자나 지역 특산품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 손민두 코레일 KTX기장은 광주 출신으로 1985년에 철도청에 들어가 2004년 4월1일 경부고속철도 개통 첫 열차를 운행하고 무사고 2백만 킬로미터를 달성한 베테랑 기장이다.

틈틈이 코레일 사보 <레일로 이어지는 행복플러스>기자로 활동하면서 KTX객실기내지 <KTX매거진>에 기차와 인문학이 만나는 칼럼 '기차이야기'를 3년간 연재하며 기차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광주in>은 손 기장이 그동안 잡지와 사보에 연재했던 글과 새 글을 부정기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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