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교도소가 삼각동 새집으로 이사했다. 필자는 대학시절 학생운동하면서부터 광주교도소와 인연을 맺었고 그 후 노동운동하면서 네 번을 더 다녀와야 했다.

▲ 정찬호 노동활동가.

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는 집 다음으로 가장 오랜 세월을 보낸 곳이어서 ‘큰 집’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처음 두 번은 시국사범들만 모아 수용했던 ‘시베리아 형무소’라 불리는 2사에 수용됐었다.

2사는 복식구조로 만들어졌으며 가운데 복도를 끼고 양쪽으로 독방이 50개씩 배치돼 있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육중한 철문들 사이 콘크리트 복도를 걸으면 한여름에도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재소자들 내에서는 그런 구조에다 시국사범들이 집단으로 수용되어 있다 보니 자연스레 러시아 반체제 인사들을 가둬 두었던 ‘시베리아 형무소’로 불리게 된 것 아닌가싶다.

독방은 한 명이 세로로 길게 누워 잠을 잘 수 있고 벽에 기대고 다리를 뻗으면 좁아서 펴지질 않는다. 머리맡에는 화장실이 있고 비닐 문이다 보니 앉아서 일을 보면 교도관이 시찰구를 통해 화장실 안까지 살필 수가 있다.

재래식 화장실은 나무판자로 덮어놔도 구데기가 기어 나왔다. 한두 마리는 방안까지 기어들었고 그럴 때마다 폐기된 젓가락으로 집어서 다시 변기에 집어던지곤 했다. 그리고 큰일을 보면 똥물이 튀어 올라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한겨울에는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메트리스와 솜이불을 두 세 겹으로 깔고 덮어도 추위를 막을 길은 없었다. 식용으로 준 온수 통을 가슴팍에 품어 보지만 두 세 시간 지나면 식어버린 온수 통이 거꾸로 내 체온을 빼앗아갔다.

▲ 지난 19일 44년간(1971~2015년) 광주 북구 문흥동 역사를 끝내고 북구 삼각동에서 새역사를 시작한 새 광주교도소. ⓒ광주인

아침에 일어나면 메트리스 바닥이 마치 오줌을 싼 것처럼 축축하게 젖는다. 이런 추위는 자연스레 손 발가락 동상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필자는 가장 싫어하는 것이 겨울 징역살이다. 혼거 방은 7~8명이 함께 기거하기 때문에 서로의 체온으로 방안 온도를 보존해줘 독방에 비하면 펄펄 끓는 아랫목 수준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시국사범들에게는 가족이나 친인척이 아니면 아예 면회가 되지 않았으며 신문, TV 등 외부 소식 또한 일절 접할 수가 없었다.

몇 년 후 재수감되었을 때는 재래식 화장실은 수세식으로 바뀌었고 그 후에는 신문구독, 커피 차 구매, 샤시문 설치, 온풍시설, 선풍기, TV 녹화방송까지 입소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개선되어갔다.

교도소 본래의 기능을 갖기 위해 반가운 일이었지만 광주교도소가 오래된 데다 수용인원이 많다보니 미결수 1일 운동시간 30분과 접견시간 10분은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

그리고 삼각동으로 새 건물로 이사를 갔다. TV언론보도는 넓고 쾌적해 보였으며 냉·온방시설도 갖췄다고 한다. 좋은 시설에 이어 교정행정도 잘 짜여 지면 1,700여 재소자들의 사회 복귀에 큰 보탬이 될 거라 생각한다.

새집에 맞게 ‘범털’문화도 없애고 변호사 접견을 가장한 가진자들의 특권문화도 일소하는 진정한 교도소가 되었으면 한다.

▲ 광주시 북구 삼각동 새 광주교도소. ⓒ광주인

또한 광주교도소는 518 민주인사들이 투옥생활을 했던 사적지중 하나이며 수많은 민주, 통일, 노동인사들이 옥고를 치룬 곳이다. 초현대식이다 뭐다하면서 허물어뜨리거나 변형시키지 말고 후세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역사 교육장으로 활용하게하면 아주 좋겠다.

조만간 옥바라지 하느라 고생했던 가족과 동료들에게 시베리아 형무소의 그 서늘한 기운을 안내해야 할 것 같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