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칠갑산 가는 길은 너도 나도 밤나무다. 초록을 뒤덮은 누런 밤꽃은 정신없이 피었다. 꽃은 피었다기 보다 뿌려졌다.

밤꽃 향기는 맡았던 기억 그대로, 정액 냄새가 난다. 정액에 있는 스퍼민이라는 물질이 밤꽃에도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콩밭 맬 때와 밤꽃 필 때는 겹치는지, 왜 콩밭을 매다가 홀어머니와 호미를 집어 던지고 시집을 갔는지, ‘기쁨을 아는 몸’은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칠갑산 장곡사를 가면서, 불경스러운 생각을 했다.

▲ ⓒ이광이

▲ ⓒ이광이

장곡사는 청양 칠갑산 서남방으로 흐르는 장곡천을 두르고 서 있다. 대웅전이 두 개라서 특이하다. 일주문 지나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종루와 운학루가 나온다. 운학루는 예스럽고 색이 좋다. 그 뒤로 마당을 지나 대웅전이 하나 있다.

말사에서 흔히 보이는 가람 배치다. 그것이 하(下) 대웅전(보물181)이다. 맞배지붕인데 조선중기에 지어졌다 한다. 작고, 단정하다. 왼쪽으로 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면 대웅전이 또 하나 나온다. 상(上) 대웅전(보물162)이다. 역시 맞배지붕이고, 고려말기 양식이다. 둘은 형제처럼 비슷하지만, 상은 동남방, 하는 서남방, 해서 보는 방향이 좀 다르다. 내 눈에는 위에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안에는 3개의 철불이 모셔졌는데, 누가 빚었을꼬? 내가 절에 다니면서 저렇게 못 생긴 불상은 처음 봤다. 가운데 앉은 비로자나불(보물174). 눈은 작고, 눈꺼풀이 축 처지고, 이마는 너무 넓다.

앉은 자세도 뭔가 엉성하고, 좀스럽다. 좌측 아미타불은 그 보다 더 못 생겼다. 못 깨달은 부처처럼 보인다. 반면, 우측 약사여래불(국보58)은 기품 있게 잘 생겼다. 하필, 잘난 것 옆에 앉아 더 그럴 것이다. 운주사처럼 노지에 앉아 있는 석불이야 본래 투박한 맛이 제멋이지만, 대웅전에 떡 앉아 있는 것 중에는 아마 제일 못났지 싶다.

▲ ⓒ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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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꾸 쳐다보게 된다. 늘 표정도 비슷하고, 잘 생긴 것들을 하도 많이 봐서, 불상이 거기서 거기지만, 못난 것을 보니 이상하게 끌린다. 좋다, 오늘은 못난 부처에게 삼배를 올린다. 머리 좀 나게 해달라고 빌며. 탈모 해탈 발모 발원! 그러고 보니, 못 생긴 처녀들이 저 부처에게 좀 예쁘게 해 달라고, 빌지 않았을까 싶다. 아니 그건 잘 생긴 부처에게 빌어야 하나? 사람 마음이 안 그런 것이다.

빈다는 것은 남 몰래 귓속말로 하는 것. 서로 못나 공감을 느끼는 이가 가깝고, 속내를 털어놓는 법. 저 부처는 그런 것을 잘 받아 줄 것처럼 생겼다. 자꾸 보니, 정이 든다. 절을 하는 바닥이 나무마루가 아닌 돌 마루다. 유문전석(有文塼石). 전(塼)은 벽돌이다. 연꽃 문양이 있는 벽돌바닥. 타일처럼 깔려 있는 전석은 통일신라 것이라 한다.

왜 대웅전이 둘인가는 설이 분분하다. 위 것은 극락세계를, 아래 것은 사바세계를 상징한다는 주장. 두 개의 절이 따로 있었다는 전설 같은 얘기. 임진왜란 같은 난리 통에 본래 것이 반쯤 타서 새로 지었고, 후에 탄 것을 보수해서 두 개라는 가설까지, 그럴싸한 말들이 오고갈 뿐 정확한 것은 모른다. 내가 거기에 하나를 보탠다.

위 것은 아래로부터 한 50m 올라야 하고, 상당히 가파르다. 거기 경사진 땅을 다져 지어서 마당이 좁다. 대웅전과 응진전, 당우 두 개로 꽉 찬다. 비탈은 비 오거나 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대웅전을 나다니기가 사납기도 하고, 앞마당에 중생들을 모아놓고 설법도 해야 하고, 미를불괘불탱(국보300)을 걸어놓고 초파일 행사도 해야 하는데, 겨우 수십명 앉을 공간 밖에 없으니, 대웅전이 제 구실을 못한 것이다.

▲ ⓒ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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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래 평평하고 너른 곳에 터를 잡고, 대웅전을 새로 짓지 않았을까? 위 것은 상왕의 존재처럼 모셔두고, 아래 실용적으로 쓸 자그마한 대웅전을 하나 더 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위 대웅전처럼, 비로자나불이 가운데 앉고, 좌협시 아미타, 우협시 약사여래가 앉으면, 보통 ‘대적광전’이라 부르는데, 그것이 왜 대웅전이 됐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 대웅전 왼편에 설선당이 늙은 멋을 잘 간직하고 있다. 개심사 심검당하고 거의 구조가 같다. 거기 앉아 차 한 잔 하면 좋으련만, 축대를 고쳐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초파일 지나 절에 가면 불사를 많이 한다.

장곡사에는 이야기가 많다. 여름 날, 천년의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옛날 언젠가 내가 거기 머물렀던 것처럼, 새록새록 이야기가 떠오른다. 다음에 오면, 왜 대웅전이 둘인가, 왜 탑이 없을까에 대해 재미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겨날 것이다. 장곡사 가는 길에는 벚나무의 터널이 있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 ⓒ이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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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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