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서 유품을 정리하다 편지를 한 장 발견한다. 생전에 빚진 6000만원을 갚아달라는 내용이다. 자식 넷이 황당하다. 이 돈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큰 딸은 연 1억원을 버는 의사다. “공평하게 1500만원씩 나눠 갚자”고 한다.
막내딸이 반발한다. 남편은 실직 상태다. 계약직 판매사원으로 소득은 연 2000만원 수준. “돈 잘 버는 언니 오빠가 더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이광이

큰 아들도 곤란한 얼굴이다. 중소기업 과장으로 혼자 번다. 소득은 4000만원 정도. “애들이 대학을 다녀 돈 쓸 일이 너무 많다.”고 한다. 동생을 쳐다본다.

둘째아들은 공무원이다. 부인이 교사로 맞벌이다. 소득 8000만원이 넘는다. 그런데 “애를 유학 보내야 하니, 여유 돈이 없다”고 발을 빼려 한다.

EBS 다큐, 정의와 분배에 관해 나온 사례를 간추린 것이다. 빚이 6천만이니, 넷으로 나눠 1500만원씩 내자는 큰 딸의 말이 얼핏 공정해 보인다. 하지만 기계적 형평이다. 산수로는 맞지만, 사람 사는 것이 어디 그런가? 그 돈을 내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처지도 있다. 입장과 형편이 다르고, 사연도 제각각이다.

무엇이 분배의 정의에 맞을까? 이 문제는 아주 쉽다. 답은 “가서 길을 막고 물어보라”는 우리 속담 안에 있다. 제 3자에게 맡기고 당사자에서 벗어나면 된다.

다큐는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로 설명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네 사람을 베일 뒤로 초대하여 문제를 냈다. 자녀의 역할을 하나씩 맡지만, 자기가 누군지는 모른다. 그들은 ‘원초적 입장’에서 논의한다.

답은 소득이 많은 자가 많이 내는 것으로 나온다. 장녀-차남-장남-막내딸 순으로, 차등하여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합의가 정의다. 만일 자기가 누군지 알았다면, 주장은 달랐을 것이고,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런 해답의 원초적 저작권은 부처에게 있다. ‘무아(無我)’. 고정불변의 실체로서 나는 없다는 어려운 말 말고, 그냥 나를 잊으면 무아다. 나는 내 방에서 도저히 문제를 풀 수 없다. 전부 내 것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 방에서 나와 무지의 장막이 쳐진 저 방으로 들어가면 문제는 풀린다.

이 사례는 지혜는 많이 배우거나 돈 많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 기계적 형평은 돈이 많거나 많이 배운 사람이 주로 하는 주장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사람에게 지식과 부유함은 자기 것을 더 가지려는 쪽으로 사용된다.

▲ ⓒ이광이

역시 지혜는 당사자이면서 당사자를 벗어나는 데에 있다. 거기 있는 줄 알지만, 당사자를 잊는 것이 어렵다.

흑인 노예는 해방되어야 하는가? 내가 백인이면 노우이고, 내가 흑인이면 예스다. 세금을 더 내야 하는가? 내가 부자면 노우이고, 내가 빈자면 예스다. 합의가 안 된다. 하지만 무지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면, 둘은 손잡고 나올 수 있다.

양반처럼, 맑은 계곡에서 술 한 잔 하고, 시를 읊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지금이 조선시대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만약에 상놈으로 태어났었다면 어쩔 뻔 했나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조선시대를 포기하고, 그냥 21세기에서 산다.

**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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