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강진 무위사. ⓒ이광이

전남 강진 무위사는 내 고향 집에서 30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

해남에서 강진 가는 길, 왼쪽으로 화살표가 나 있는 밤색 이정표가 눈에 선하다. 어릴 적 그 곳에 살았고, 떠나온 후로도 조상이 부를 때마다 다녀가곤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왼쪽으로 꺾어 그 절에 들르는 법이 없이, 광주로 서울로 직행했다.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옛 이야기를 들을 여유도 없었고, 겨를도 없었다. 극락보전도 촌에 있는 것이 보나마나 그만저만 할 것이니,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보다 아름다운 것, 멋진 것들은 멀리 있었다.

반드시 봐야 하고, 외워야 하고, 증명사진 찍어야 하는 것들은 최소한 광주에, 멀리는 서울에, 경주에, 더 멀리는 희랍에 있었다. 어떻게 그런 훌륭한 것들이 저 월출산 남쪽 촌구석, 유배의 땅에 있겠는가? 그것은 다산초당도, 백련사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조부가 산을 몇 개 넘어 나무하러 거기까지 갔었다는 대흥사는, 국민학교 봄날 소풍을 다녀온 기억이 있다. 그 뒤로 수학여행은 경주로 갔다.

▲ ⓒ이광이

나는 유홍준의 답사기를 처음 보면서 “어~어! 이거 우리 동네네. 이게 여기 왜 나올까?”하고 놀랐다. 늘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았던, 무위사가 답사의 일번지라니!

“국토의 최남단, 강진과 해남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장 제1절로 삼은 것은 결코 무작위의 선택이 아니다. 답사라면 사람들은 으레 경주 부여 공주 같은 옛 왕도의 화려한 유물을 구경 가는 일로 생각할 것이며, 나 또한 답사의 초심자 시절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강진과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한 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본 적이 없었으니, 대단한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곳이며…” 그러나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답사기는 내게 충격과 부끄러움을 안겨줬다. 영남대학교 미학, 미술사학 학생들이 초행으로 내 고향을 둘러보고는 “황홀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마치 꿈결 속에 다녀온 미지의 고향 같다.”고 했다니. 나는 그들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 ⓒ이광이

사진을 찍어 보면, 꼭 반짝이는 빛이 있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저녁 어스름에 찍은 사진,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 깊은 맛이 우러나는 사진이 잡힐 때가 있다. 그들이 느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이 한적한 절집의 분위기에 척 어울리는 저 소담하고 단정한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반도 전하지 못할 것 같다.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저 극락보전은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

나도 그처럼, 꽤나 오래 극락보전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지만,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 모습처럼 되어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다만, 일주문을 빠져 나올 때, 어느새 내리던 비가 그쳐 있었다는 것, 옛날에는 그만저만하리라고 궁금해 하지도 않았던 것들을 쳐다보느라 벌써 2시간 넘게 흘러 가버렸다는 것을 알고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면, 보인다. 내가 찾던 신발 한 짝을 내가 들고 있는지도 몰랐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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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창화담>은 산사 이야기와 범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연재를 맡은 이광이 님은 <무등일보> 노조위원장과 참여정부 시절 문화관광체육부 공무원 그리고 도법스님이 이끈 조계종 총무원의 자성과 쇄신 결사에서 일 했습니다. 저서는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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