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김용국] 마흔 여덟, 갑오년 세모에 서서
[교육칼럼- 김용국] 마흔 여덟, 갑오년 세모에 서서
  • 김용국 정광고 교사
  • 승인 2014.12.25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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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인권, 행복 소중히 여기는 교사로 거듭 날 터

마흔 여덟, 나의 생(生) 갑오년 한 해가 지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의 한 해가 역사 속으로 잠겨 들고 있다. 사람들은 항상 세모에 서서 자신을 되돌아보거나 새해의 알찬 계획을 세우거나 소망을 빈다.

▲ 김용국 정광고 교사.

나 역시 그렇다. 우선 나의 한 해를 되돌아보면 반성 덩굴이다. 그 덩굴의 첫째가 바로 사람을 수단으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고3 담임 2년 차였던 올 한 해, 나는 남부끄럽지 않게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나는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해도 수능이 끝났을 때 슬프고 우울했다. 두 해 모두 서울대 합격자를 단 한명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대 이외의 대학교는 대학교로 인정하지는 사회 풍토 속에서 서울대생을 배출해내지 못한 담임은 죄인이나 마찬가지다.

학부모들도 서울대생을 배출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원인으로 담임교사를 암묵적으로 지목하고 있고, 항상 서울대생 합격자가 몇 명이냐로 명문고냐 아니냐로 판명나는 교육계 현실 때문이다. 학생 전체의 입학 평균 실적은 의미 없다. 오직 서울대생 합격자가 몇 명이냐로만 판단한다.

이제 수능은 올림픽이 되었다. 은메달과 동메달의 가치는 무시된 채 오직 금메달로만 순위를 매기는 올림픽처럼 이제 수능은 오직 서울대 합격생으로만 잘났네, 못났네를 따지고 있다. 이는 가히 ‘수능올림픽’에 다름 아니다. 어떤 학과인지도 묻지 않는다. 그냥 대외적으로 자랑할 수 있는 합격자이면 된다.

그래서 어떤 교사들은 서울대에서 가장 합격가능성이 높은 지원율 낮은 학과에 지원시킨다. 그리하여 그 과실의 단맛은 담임교사가 따먹고, 학생에겐 일단 서울대 가서 정말 마음에 드는 학과를 부전공으로 선택하라고 꼬드기지만 수재들이 우글거리는 이 세계에서 어디 이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만약 그리 못할 땐 학생이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학생에게 호통 치면 된단다.

일선 고교에선 서울대생을 배출한 학생이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고3담임의 공으로 돌리고 이를 포상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서울대생을 배출하지 못한 것 또한 담임교사의 책임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한 명의 서울대생을 만들기 위해선 고교 전 학년 담임교사들과 이들을 가르쳤던 모든 교사들의 합작품일진대 그 모든 공과 실의 책임을 고3 담임교사에게 돌리다니 말이다.

이렇게 무리한 포상을 남발하는 곳은 사립고교가 많은데, 그 이유는 학교관리자의 고도의 인맥 관리 노하우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 인근의 모 사립고에선 자신의 최 측근이랄 수 있는 교사에게 고3 학년부장을 주는데, 사립고교에서 고3 학년부장의 파워는 크다.

모 사립고에선 인사위원회 심의도 거치지 않고 학교관리자가 고3 학년부장을 선정하는 전횡을 휘두르기도 한다. 이런 전횡은 그대로 고3 학년부장에게 이어지는데, 그는 반 배정도 독단적으로 해버린다. 이때 같은 인맥 선상의 교사들에겐 포상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큰 인문계, 자연계 각각 전교 1등 학생이 있는 반을 배정해 준다.

연말 포상 교사 선발에 있어서도 마음대로 포상자의 한계를 그은 채 자기 인맥 라인의 교사를 추천해버린다. 결국 불평등과 불공정이 난무한 ‘그들만의 리그’이고 ‘그들만의 나눠먹기 짬짜미’인 것이다. 이런 풍토 속에서 인맥의 방외자들이 무슨 의욕을 갖고 적극적으로 일하겠는가. 결국 갑들의 횡포와 을들의 침묵 속에 학생들만 피해를 입게 되는 셈이니 이는 교단의 추한 진상이다.

사실 우리 학교에도 이런 모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모순점을 발견하고도 인사위원회 세칙 개정을 위한 투쟁이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하지 않았다. 외려 수능이 끝나면 서울대생을 배출해내지 못한 나를 자책하기 일쑤였고, 기대 했던 학생에 대한 은근한 원망을 지니는 속물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투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전교 1등은 없지만 꼭 서울대생을 배출해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리라는 심보도 작용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던가. 이런 심보는 학생들을 갈구는, 관용을 앗아가는, 독재자적 교사로 나를 만들어 갔고, 얼굴은 웃음보다는 잔뜩 부아 난 표정만을 지어갔다.

이런 심보 속 어디에 아이들의 인권이나 행복, 건강 같은 덕목이 자리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렇게 서서히 괴물로 변해갔다. 아이들의 조금 늦은 지각에도 혼을 냈고, 수업시간 조는 아이들에겐 험한 소리를 하곤 했다. 똘레랑스가 개입할 여지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만큼 얼굴은 험악하게 굳어갔다.

나는 권한다. 고3 담임교사는 3년 정도만 하고 그 역할을 다른 교사와 교체해야 한다고. 물론 우리 학교에선 이런 원칙이 시행되고 있지만, 가만 들어보면 이 원칙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왕왕 있다. 그 대표 장본인들이 거개가 승진에 눈먼 교사들이다.

나는 내년에도 고3 담임교사를 신청했다. 고교 교사로서 대입 진학지도 경험을 쌓고 싶어서다. 나의 실수를 줄이고 최대의 효과를 내고 싶어서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과도한 ‘군사부일체’로 이어지지는 않도록 삼갈 것이다. 학생과 교사의 지나친 일체감은 자칫 교사의 과도한 욕심으로 이어지고 이는 학생들의 인권, 건강, 행복에는 무심한 채 서울대생에만 목매어 이들을 억압하는 괴물로 이끄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인권, 건강, 행복 같은 덕목들은 교사가 학생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때 잘 볼 수 있는 가치들이다. 이런 가치들을 존중했다면 ‘4.16 세월호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삼백 여 단원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숭배하고 숭배하는 돈이란 물신의 바다에 익사해버린 것이다.

마흔 여덟, 갑오년 세모에 서서 나는 다짐해본다. 만약 을미년 새해에도 고3 담임교사가 된다면 이런 가치들의 소중함을 재인식함으로써, 나의 괴물적 심성을 정화해 보겠다. 모든 물상은 수단과 목적이란 양면성을 지닌다지만 나는 이를 위해 우선 학생들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보려 노력하고 싶다.

아무리 고상한 목적이라 하더라도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을 억압할 권리가 내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틈틈이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전시륜의<유쾌한 행복론>을 읽고, 이를 학생들에게 권해보리라. 그리하여 이들이 고해의 인생을 유쾌하게 살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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