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과연 인생의 끝인가

죽음은 어느 누구도 경험할 수 없다. 끝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태어나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죽는 것은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자살이다.

죽음을 경험하지는 못할지라도 죽음을 가까이 느낄 수가 있다.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다. 체험한 경험이다. 수술을 하게 됐는데 의사와 아내가 하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아무래도 좀 어렵다는 것이다. 나도 혹시 그런 게 아닌가 했는데 의사 말까지 들으니 도리가 없다.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아내가 손을 잡는다. 그 눈빛이 서럽다. 아아 마지막이구나.

전신마취를 했다. 깜박 마취가 되는 동안은 몇 초가 걸릴까. 이제 깨어나지 못하면 죽음이다. 그 몇 초 동안, 내 인생이 눈앞에 초고속으로 지나간다. 그 중에 하나. 어느 부인의 까맣게 탄 입술. 그 입술이 선명히 떠오른다. 어머님이다. 어머님의 까맣게 탄 입술.

1956년 대학 1학년. 해공 신익희 선생이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急逝)를 하자 경무대 앞에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승만 독재가 신익희 선생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국민들이 흥분했고 대학생들은 경무대 앞으로 몰려갔다. 발포가 있었고 사상자도 생겼다. 도망가다가 특무대에 잡혔다. 옥인동인가 506특무대로 끌려갔다.

주모자를 대라고 많이 맞았다. 놈들은 집에도 연락을 안 해 준다. 마포서로 이감 후 겨우 일주일 만에 가족에게 요령껏 연락을 했고 부모님이 면회를 오셨다. 그 때 본 것이 어머님의 까맣게 탄 입술이었다. 그런데 난 웃었다. 지가 무슨 영웅이나 되는가. 바로 그게 지금 50년이 지났는데도 잊혀지지 않고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실에 들어가는 순간에도 마지막 생의 기억으로 떠오른 것이다. 불효의 기억이다.

영화 ‘변호사’에서 부림사건 연루 학생들의 어머니가 혹시나 자식의 시체라도 찾을까 영도다리 밑을 해매고 인근 야산을 뒤진 그 마음이 1956년 5월의 우리 어머님 마음이나 무엇이 다를까.

생과 사의 경계는 어디 쯤 될까. 수술실에 들어가 마취가 될 때 나는 이미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닐까. 분명 그것은 죽음이다. 그리고 다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그것은 생이었다. 지금도 몸이 떨리는 꿈을 꾼다.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어릴 때 뛰어 놀던 마을을 내려다보며 한 생각은 생인가 사인가. 그 마지막 순간에 노대통령의 모습을 떠 올리면 머릿속이 하얗게 바랜다.

죽음은 분명히 두려운 것이다. 일체의 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 새끼들도 못 보겠지. 그것을 느끼는 것이 두렵다. 누군가 말했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 두렵다고.

젊어서는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느끼던 죽음이 지금은 아주 가까이 느껴진다. 그 때 죽는다는 공포가 지금은 이웃처럼 가까이 느껴진다. 성숙인가 순응인가. 생은 유한 하지만 죽음은 영원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산다.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죽어 남의 기억 속에서 얼마나 살아남을까.

삶은 끊임없는 악과 선의 대결이다. 생과 사는 서로 먼 곳에 있는 듯 바로 피부처럼 붙어 있으며 끊임없이 갈등하며 공존한다. 인간의 가슴속에는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살인이 저질러지며 증오의 불길로 불태워 지는가. 자신은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누군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가.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문득 뺨에 부드러운 촉감을 느낀다. 화단에는 무슨 꽃인지 몰라도 생명이 돋아난다. 지난겨울, 죽음으로 느꼈던 긴 나날을 견디며 다시 살아나는 생명이다. 인간이 저처럼 다시 생명으로 살아난다면 악은 존재할 것인가. 되살려지는 죄의 기억으로 절대로 악을 행하지 못할 것이다.

신의 영역을 넘볼 정도로 탁월한 인간의 능력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불멸의 지위를 누리지만 역시 눈앞인가 창밖인가 서성이고 있는 ‘죽음’의 눈길에서는 벗어날 길이 없다. 내가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느낄 때 불효라고 떠 오른 어머님의 까맣게 탄 입술의 기억은 바로 양심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수도 없이 성자와 악마의 경계를 오가는 것이 살아 있는 인간이다. 손수레에 폐지를 주워 모으는 노인에게 남몰래 돈을 쥐어주고 부끄러워 도망가듯 사라지는 인간과 방송과 신문에 얼굴을 내밀고 수도 없이 거짓말을 지껄이고 하루 5억의 몸값을 탕감 받는 인간도 마음속 살인을 저지르는 같은 인간이되 타인이다.

반도체 공장에서 발암물질에 몸을 내 맡기고도 환하게 웃는 소녀의 얼굴은 지금 살아 있는 것인가. 죽은 것인가. 수 십 미터 철탑위에서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며 단식 농성을 하는 노동자의 눈빛은 살아 있는 눈빛인가 죽은 자의 눈빛인가. 생과 사과 공존하는 현장을 내려다보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볓은 따스한가 차거운가. 하늘을 보기는 떳떳한가.

자살 전 봉투 속에 70만원을 넣으며 집 주인에게 ‘죄송합니다’ 마지막 편지를 쓰는 송파동의 세 모녀는 그 순간 이미 죽은 몸이다. 그 시간 서울의 강남 어느 단란주점에서 울려 퍼지는 취객의 노래 소리는 즐거움인가 통곡인가.

생과 사의 갈림길이 애매한 땅에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눈앞에서 웃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 그것이 축복인줄 알고 산다.

행복·불행·절망·희망

찬바람이 몰아치는 청계천 광장에서 언론개혁을 외치며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희망을 느낀다. 청중들은 박수를 친다. 옆을 보면 동아일보 뒤를 보면 조선일보의 높은 건물이 보인다. 희망과 절망은 고개 돌리기 차이다. 사람마다 희망을 보는 눈도 절망을 보는 눈도 다르다. 절망의 정치를 덮어버리는 언론의 막장이 거기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마치 세상을 지배한 듯 오만한 얼굴로. 그러나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수조원의 재산을 가진 재벌은 주가가 몇 푼 떨어졌다고 절망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길가에서 찐 옥수수를 파는 아주머니는 오늘 많이 팔았다고 행복과 희망을 느낄 것이다. 그들 두 인간의 희망과 절망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생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고 복은 타고 나는 것이고 가난구제는 나라님도 못하는 것이고 부모 잘 못 만나 고생하는 걸 누구 탓 하느냐고 한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선택해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데도 원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먹을 것 잠잘 곳이 없어 거적대기 쓰고 노숙을 해도 행복을 느낀다면 그에게 행복의 의미는 없다. 이미 신의 경지에 이르렀으니까.

고생하면서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럼 태어났는데 어쩌냐. 죽는 때까진 살아야지’ 그렇다. 고생한다고 다 죽으면 세상에 살아남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행복과 불행과 희망과 절망의 차이가 애매해 진다. 매일 징징 울면서 하나님을 찾는 여의도의 대궐같은 교회 목사님은 판사의 징역언도를 들으며 무엇을 느꼈을까. 희망일까 절망일까.

여의도 야당당사 앞에서 오래된 군복을 입고 종북규탄을 외치는 할아버지들의 횅한 눈동자. 휘두르는 주먹에 기운은 없어도 오늘 돈 몇 푼 생기면 늙은 마누라가 좋아하는 만두나 사들고 들어가야지. 순간에 느끼는 행복인가.

초딩 큰손자가 산수와 국어에서 100점을 받았다고 온 종일 얼굴이 환한 아내와 가슴속 미움을 가득 담은 채 지금 글을 쓰는 자기혐오와 글은 쓸 수 있다는 안도감은 어느 것이 진짜 행복인가.

오늘은 논리적이고 참 글을 잘 썼다고 만족하면 상대는 그놈의 늙은이 글 더럽게 썼다고 기분이 나쁜 것이다. 누구 생각이 옳은가. 하느님만이 아시는가. 하느님을 믿는다. 그러나 공평하지 않으시다고 원망도 한다. 하느님은 그럴 것이다. ‘그건 니가 몰라서 그런 것이니라’ 죽으면 하느님 하고 7시간 토론이 아니라 밤 샘 토론을 할 것이다. 중계 좋아하는 방송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있어도 안 할 것이다. 내가 할 말 다 아니까.

생과 사도 상대적이라고 한다. 행복과 불행, 절망과 희망도 그렇단다. 그러나 한 가지, 나쁜 것이 좋은 것이 될 수는 없다.

나쁜 짓이다. ‘국정원은 간첩은 날조하지 마라. 판사는 하루 노동 품싹으로 재벌 벌금 5억씩 탕감해 주지마라.’ 하느님도 얼마나 힘드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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