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중국의 벽보에서 유래한 말로 우리나라 사극에서 종종 등장하는 일종의 방(榜)으로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가에 나붙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담은 벽보문이다.

80년대 학번치고 이 용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80년대 지잡대(수도권 대학에 대비하여 지방대를 얕잡아 이르는 요즘의 말) 학번으로서 저조한 취업률을 탓하며 취업 준비한답시고 그다지 뜨겁게 살지 못 했던 나였지만 당시 학내 대자보를 보면서 사회 돌아가는 꼬라지를 직시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파생된 의분을 느끼며 ‘공부’와 ‘짱돌’ 사이의 이분법적 선택 앞에 내적 갈등을 느끼곤 하였다.

▲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로 촉발된 대학가의 철도민영화 반대 움직임. 14일 오후3시께 고려대 정경대 후문에서 열린 성토대회에는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과 직장인까지 참석해 철도민영화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민중의소리 갈무리

이를테면 대자보는 도서관 백면서생들에겐 현실 인식의 창이었고, 양심을 찌르는 좌불안석의 가시로 기능하였다.

매캐한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 도망쳐 온 친구들의 모습에 부채의식을 느끼며 그저 미안하여 거리로 나가 최루가스 속에서 눈에 치약 묻히고 돌팔매질하며 짱돌이 그리는 궤적의 의미를 곱씹는 시늉이라도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내가 보고 느꼈던 대자보에 관한 씁쓸한 추억이다.

그런데 요즘 대학가에서 실종된 줄로 알았던 대자보와 관련된 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대자보의 주인공은 고려대 경영학과의 주현우 씨다. 주 씨의 대자보는 “안녕들 하십니까”로 시작하여 철도 민영화와 파업 참가자 직위해제 논란, 경남 밀양의 송전탑 사태,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등 우리 사회의 첨예한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을 담고 있다.

나는 이 기사를 접하며 내심 흡족했다.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요즘 신세대 학생들이란 편견 속에 사로잡혀 있던 나였기에 더욱 그랬다.

주 씨의 대자보를 통해 나는 대한민국의 희망을 발견했다. 정의와 연대, 진실 규명, 역사왜곡 규탄만을 내세워도 종북세력으로 몰리는 하 수상한 시절에 주 씨의 ‘나’를 넘어선 ‘타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발로는 내 심장을 쿵쿵거리도록 흥분시켰다. 아마도 대학생 주 씨의 풋풋한 젊음과 순수의 열정에 반해서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굴곡진 것이어서 주 씨의 대자보에 대해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국민의 사상의 자유를 부여하고 있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 일베 회원이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훼손한 뒤 인증사진을 남겨 논란이 일고 있다.ⓒ일베 캡쳐

문제는 그 표현 방식이었다. 주 씨의 대자보가 언론매체의 전파를 타자 이에 반대하는 일베 회원(보수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저장소 극우보수 회원)들이 학생들이 없는 틈을 타 대자보를 찢어 훼손함은 물론 인증 사진까지 버젓이 인터넷에 게시했다. 이는 상식 이하의 행동으로 매우 수치스런 행동이다.

극히 상식적이지만 일베 회원은 주 씨의 대자보와 다른 생각을 가졌다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대자보를 정정당당히 그 옆에 붙였어야만 한다. 어둠을 틈타 못된 짓을 저지른 일베 회원의 행동은 그 자체로 자신들의 주장이 타당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맹목적 도그마의 우물에 갇혀 이관규천(以管窺天)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을 뿐이다.

오직 내 것만이 진리이고 선이라는 독선의 도그마는 세상을 삼키는 거대한 늪이다. 문제는 결국 자신마저 삼켜버린다는 점이다. 위의 일베 회원도 이런 도그마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전제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거나 매체를 접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길 권한다.

주지하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자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했다. 주 씨의 행동은 이 명제에 합당하다. 대학생도 이 땅에 발붙인 채 현실을 사는 인간이기에 그렇다. 때문에 대학생들이 현실 시국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올바른 현상이다. 대학을 학문과 예술을 즐기는 곳이라는 의미로 상아탑이라 한다.

그래서 세계 유수의 상아탑에선 나치 치하가 아닌 이상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보장하려 노력한다. 민주주의 가치 훼손이 운운되는 작금의 상황이지만 최소한 대학 시기만큼만은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도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대학생들은 치열하게 현실을 고민하며 도서관에서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접하고, 스스로 그 장단점을 파악하고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과거 취업 걱정으로만 전전긍긍했던 나였지만, 단지 올해 고3 담임이었다는 이유 하나로 염치 불구하고 한 마디 하자면 대학생들은 고교 때까지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도그마가 주입된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사회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많은 책과 사람을 통해 배워 고칠 것은 고치고 지킬 것은 지키는 안목을 신장시켰으면 한다. 이런 제자들이 결국은 반드시 대한민국의 희망 동력원이 될 것이라 믿으며 대학생 주 씨에게도 한 마디 해본다.

“당신은 대한민국의 희망 동력원입니다. 아리아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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