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면 나이를 잊는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부르는 소리는 가깝게 들리고, 잊었던 얼굴이 다가온다.

그러나
귀를 기우리면 아득히 멀어지는 소리
다가서면 눈속으로 숨는 얼굴.

집 뒤의 마을 당산나무 나이는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그냥 할머니다.

▲ ⓒ홍광석

지금은 정월 대보름에야 밥 한 그릇 술 한잔 얻어먹는 신세가 되었지만 마을 어른들 말에 의하면 예전에는 경쟁적으로 집집마다 한 상 씩 차려와 대접했단다,

지금은 영특한 인간들이 할머니의 영험함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끼리 싸움은 더 늘었다.

언제 봐도 정겨운 장독의 항아리
맑은 정화수 앞에 두고 두 손을 모았던 어머니들의 기원을 간직한 항아리 안에 지금 무엇이 있느냐고 묻지 말자.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세월이 가고, 이리저리 옮겨도 그 기원이 사라지지 않는 사실을 안다면.


붉은 꽃 피던 날이 엊그제인데 눈꽃이 만발했구나
가버린 시간을 헤아린 들 무엇하리.
허공에 떠도는 붉은 넋들을 모으는 시간.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아마.

사람이 다니는 길만 길이 아니다. 

꽃 길, 바람 길, 낙엽의 길 그리고 눈 길.
길은 지나가는 것 모두가 손님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
빗장을 걸어두지 않아도 선뜻 발을 딛지 못하는 문 바깥의 안쪽에서 그 경계를 본다.
눈은 맷돌 징검다리까지 아주 덮지 않았건만 문을 열고 오는 이는 없다.

낮에 불 밝히는 석등
밤에는 달빛 별빛 가로등 빛 그늘에 숨는다.
달빛 별빛 지면 햇빛 모아 불 밝히고 길을 묻는이를 기다린다.
숙지원의 작은 등대.

삶은 현실이다.
하우스에 숨겨둔 채전밭으로 가는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할까

▲ ⓒ홍광석

언제 보아도 좋은 장독대.
항아리 뚜껑에 쌓인 눈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만 그건 시인의 몫일터.
한 번 더 가까이 보는 것으로 인사를 가름한다.

누가 찾아왔던가.
자두나무 밑
절구통에 유리를 덮은 탁자 그리고 물확에 판자를 걸친 의자는 알고 있으리라.
지금은 돌아오는 여름을 위해 자세를 바로 잡아야할 때임을.

마늘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늘은 눈에 얼지 않는다.
파랗게 눈을 녹이고 일어서는 날,
그 날이 가까짐을 믿기에.

뒷산 소나무가 하얗다.
소나무 빛이 변한 건 아니지
눈으로 몸을 닦아 더 푸르게 하기 위함이지.

마음의 정거장을 만들어본다.
가끔 이런 날도 필요할 것 같기에.

201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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