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성 목사님이 거의 날마다 페이스북에다 좋은 시(詩)를 한편씩 골라서 올려주신다. 시심과는 거리가 먼 메마른 내 영혼을 축일 요량으로 그 시를 꼭 읽는다.

읽고 나서 댓글로 감상을 한 마디 적으면 꼭꼭 답글을 주신다. 엊그제는 시구 중에서 한 구절을 따다 붙이면서 뭐라고 한 마디 했더니 목사님이 바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같답니다.”라고 대거리해주셨다.

사는 것도 정말 신비이고, 죽는 것도 정말 신비이다. 죽은 다음도 정말 신비에 가려 있다. 아니 그러한가? 신비가 아니라 그거 뭐 그런 거라고 속 시원하게 일러줄 분 계시거든, 설명 좀 해 주시면 좋겠다. 나는 내 마음대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를 부모로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어떤 힘, 어떤 의도나 섭리에 떠밀려 존재하게 되었을 뿐이다. 내가 태어나 존재하게 된 것이 고맙고 복된 일인가 아니면 지겹고 불행한 일인가?

인류 대다수가(99%가?) 궁핍한 가운데 쩔쩔 매면서 살고 있다. 날마다 10명씩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말미암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인류 가운데서 호의호식하면서 우쭐대면서 살아가는 소수 사람들이(1% 사람들이?) 인류 대다수를 벗겨 먹고 죽이고 있다. 그것이 사람들 사는 꼬락서니다.

죽이는 사람들도 불행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도 불행하다. 도무지, 도통 행복하달 수가 없다. 거기다가 기후변화를 방치할 경우, 100년여 세월이 지나지 않아 공멸할 인류 운명이 번히 보인다고들 한다. 내가 너무 비관적일까?

손자 셋을 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마음이 쏠린다. 어떤 손자손녀가 그 할매할배한테 그러지 아니할까? 그런 우리네 손자손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의식주에 쪼들리지 않고 자녀교육이라도 제대로 시키면서 살 수 있을까? 그런 우리네 손자손녀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우리나라와 세계는 온전하게 유지될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손자들이 귀여우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기가 버겁다.

인간에게 당위와 윤리라는 것이 필요하기는 할까? 왜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사람답게) 사는 걸까? 죽으면 없어질 인생이라고 짐짓 우기면서, 대다수 사람들을(99% 사람들을) 벗겨먹고 죽이는 소수 사람들(1% 사람들)로 살아도 아무 상관없을까?

아니면 죽은 다음에 살아생전에 쌓은 선업과 악업에 따라서 마땅한 보상이나 처벌을 받으리라는 믿음으로, 또는 인과응보 이치대로 착하게 살거나 악하게 산 결과로 부자 부모 만나 다시 태어나거나 가난뱅이 부모 만나 다시 태어나거나 한다는 윤회설만 믿고 현상을 인정한 채 체념하고 살아야 할까?

살아가는 동안과 죽은 다음은, 이승살이와 저승살이는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고, 끊어진다는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양단간에 한쪽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살든지 제 맘 꼴리는 대로 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 자유, 그 판단과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후자일 경우는 책임을 지고 자시고 할 것 없을 테지만 말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매한가지일까? 살아온 내가 죽어가는 나, 죽은 다음의 나로 이어질까? 어떻게 살았느냐가 숨을 거둘 때 나로 결정(結晶)될까? 어떻게 살았는가와 상관없이 죽고 나면 나는 없어지고 말까?

무지렁이 취급당하면서 서럽게 살아가는 우리 백성들 민초들뿐 아니라, 거짓말과 도둑질로 일관하면서도, 우쭐대고 떵떵거리면서도, 허우적거리며 불쌍하게 살아가는 박근혜와 그 수족들도 자기네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그런 고급스런 고민 좀 하고 살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도서출판 <일과놀이>는 모든 사람이 서로 아끼고 섬기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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