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초대한 손님들을 보며

처음 숙지원은 네 필지의 논과 밭이었는데 자두나무 감나무가 두 그루씩, 대추나무가 세 그루, 개복숭아 나무가 한 그루가 경계 표시로 서 있었을 뿐이다.

아내와 나는 그 텅빈 땅에 유실수로는 감 자두 살구 매실 사과 배 모과 오디 무화과 비파 등을 심었고, 동백 금목서 은목서 동목서 해당화 배롱나무 함박꽃 철쭉 목련 치자 등은 꽃을 볼 목적으로 골랐다.

그중에서 이곳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비파 치자 무화과 돈나무 목련 등 몇 종류는 자연 도태 되었으나 대부분 나무들은 지금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다.

▲ 배롱나무 꽃(목백일홍). ⓒ홍광석

배롱나무는 꽃을 볼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 훗날 꽃그늘 아래 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심은 나무였다.

[배롱나무는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꽃이 한 번에 피고 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날에 걸쳐 번갈아 피고 져서 오랫동안 펴 있는 것처럼 보여 백일홍이라고 부른다. 백일홍(Zinnia elegans)은 국화과의 한해살이풀이므로 주의해야 한다. 중국 남부 지방의 원산으로 대한민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에도 분포한다. 줄기를 간지럽히면 간지러운 듯 가지가 흔들어진다. 그래서 간지럼 나무라고도 한다.] (인터넷 백과사전 인용)

우리나라에서는 옛날 선비들이 공부했던 서원이나 개인의 정원 혹은 원림에 많이 심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가 전남 담양의 명옥헌 배롱나무라고 한다.

이른 봄 매화를 시작으로 살구 자두 사과꽃으로 이어지더니 요즘 숙지원에는 백일홍이라고 불리는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 풀꽃 백일홍.ⓒ홍광석

그러나 숙지원에는 다른 종(種)이면서 이름이 같은 또 다른 백일홍이 또 있다. 배롱나무 꽃과 달리 일년초인 풀꽃 백일홍도 여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이다. 배롱나무 백일홍은 풀꽃 백일홍에 비해 꽃의 색깔이 다양하지 못하고 꽃송이 하나의 크기도 작다. 줄기에 작은 꽃들이 송알송알 맺혀 커다란 차례로 벼가 익을 무렵까지 피고진다.

반면 풀꽃 백일홍은 다양한 수채화 색깔에 그 모양도 수 없이 많고 꽃도 들국화만큼 크다. 풀꽃 백일홍은 약한 줄기에서 어제의 꽃이 지면 오늘 다시 오늘 새로운 꽃을 피우는데 이 역시 가을까지 이어진다.

연약한 풀꽃 백일홍은 비록 스치는 바람에도 가볍게 흔들리지만 여름 뜨거운 볕에도 쉬 시들지 않는다. 또 벌이 많이 찾는 배롱나무 꽃에 비해 풀꽃 백일홍은 우아한 호랑나비들이 나비들이 많이 찾는다. 가까운 풍경이지만 서로 다른 머나먼 꿈을 꾸는 백일홍들을 번갈아본다.

▲ 아기범부채.ⓒ홍광석

꽃은 존재함으로써 사람을 치유케 하는 능력이 있다.

아침 꽃은 지난밤 꿈의 미망에서 벗어나게 하여 맑은 희망을 보여준다면, 한 날을 무사히 접으며 내일의 기원을 담는 시간에 만나는 노을 질 무렵의 꽃들에는 옛 사람의 얼굴에 겹쳐지고 지나간 날의 기억들을 되살려낸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고 비스듬히 서 있어도 멋스러운 꽃들, 넘치는 행복은 아니어도 오래도록 잔잔한 미소를 안겨주고, 손에 잡히지 않는 색깔 향기가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기는 꽃들을 보며 일상의 피로를 덜어낸다.

그 꽃들의 심연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 한 켠에 남은 사람에 대한 원망도 접고 미움도 버리고 아픔까지도 위로받는다.

▲ 멜란포디움. ⓒ홍광석

제 몸을 이길 수 없을 만큼 욕심껏 꽃을 핀 도라지는 슬쩍 부는 바람에도 몸을 눕힌다. 키 큰 달리아 한 뿌리에서는 여름 내 색깔과 모양 다른 꽃을 쉼 없이 피운다.

노란 별꽃을 자랑하는 키작은 멜란포디움, 아침에 피었다가 점심 무렵이 되기전 입을 다무는 색색의 채송화, 무성한 아기범부채, 땅바닥 한구석에 납작 엎드린 보랏빛 파라솔도 저마다 소리와 향기를 가진 숙지원의 손님이다.

아마 아내가 아니었다면 크고 작은 색색의 꽃들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숙지원의 꽃들을 아내가 초대한 손님이라고 부른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짧게 만나는 손님.

▲ 산나리. ⓒ홍광석

연일 새롭게 터지는 정치 경제 사회 민족 문제들이 정신을 못 차리게 한다. NLL과 대화록은 슬그머니 묻히는 중이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는 시국선언과 촛불 시위는 주춤하고,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는 국회의원들의 휴가를 핑계로 끝내려 한다.

개성공단은 폐쇄의 위기에 처했다. 4대강 사업이 mb의 의도가 숨은 사실상 실패작이라는 소식이 언론의 새로운 먹거리로 등장한 것 같다.

NLL 의혹, 개성공단의 폐쇄, 국정원 대선 개입 국정조사와 촛불시위 등 그것들의 문제점을 모조리 mb에게 싸잡아 덤터기를 씌우는 수순으로 가는 듯한 인상이다.(그것도 하다 말겠지만)

귀태라는 말에 발끈하던 청와대는 말이 없다. 아무것도 자신과 관계없다는 듯 오불관언의 자세로 앉아 세월을 낚는다.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그네들에게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덤비는 사람들만 머쓱해지는 시간이다.

▲ 달리아.ⓒ홍광석

부르는 이도 없지만 특별히 가고 싶은 곳도 없는 우리에게 숙지원은 마음편한 쉼터이다. 각자의 내력을 담은 꽃들의 소리를 들으며 잠시 울타리 바깥세상의 소식에 귀를 막는다. 배롱나무 꽃그늘에 서서 풀과 나무에 사는 곤충들의 합창에 여름을 식힌다.

곤충들의 합창이 끝나면 가을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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