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통일의 작은 초석이 되었으면…!

김두봉은 경상남도 동래(?)출신으로 1908년 보성고보를 졸업하였고, 중앙·보성·휘문 고보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주시경 밑에서 한글을 연구하고 광문회(光文會)에서 조선어사전 〈말모이〉편찬사업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24년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상하이 인성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1935년 민족주의자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이후 후베이 성[湖北省] 장링[江陵]·충칭[重慶]을 거쳐 1942년 옌안[延安]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여기서 조선독립동맹에 가담했으며, 1942년 7월 주석에 취임했다.

8·15해방 후 북한에서 조직된 북조선노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지냈으며 한글학자로도 유명하다.

8·15해방 이후 1945년 12월 평양에 들어왔고,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자 부위원장을 맡았다(위원장은 김일성). 1946년 2월 조선독립동맹이 조선신민당으로 개칭되었고,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8월 조선신민당이 북조선공산당과 합당, 북조선노동당이 조직되자 중앙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그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 북조선인민회의(최고인민회의의 전신) 의장 겸 상임위원장, 임시헌법제정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으면서 북한의 정권 창출에 관여하였다. 북한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과 조선노동당 상무위원을 맡는 등 북한정권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던 연안파의 종파주의적 행동과 관련하여 1958년 3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대표자회의의 결의로 당으로부터 제명된 것으로 알려졌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발췌 인용하였음.)

기록상으로 보면 분명히 김두봉은 공산주의자였고 한 순간 북한 권력의 2인자였다. 그러나 그 이름은 어느 날 북한 정권으로부터 숙청당해 소리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렇다고 비록 독립 운동에 온 몸을 바쳤던 사람이고 또 탁월한 학문적인 업적이 있다고 한들 대한민국 정부가 김두봉의 존재를 인정해줄 상황은 아니었다. 그가 북한 공산주의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는 사실만으로 남쪽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남과 북 양쪽에서 지워진 인물, 김두봉.

내가 어떤 경위로 김두봉을 알게 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아마 남한의 제 모순이 일정부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때문임을 알게 되면서 일제강점기에 중국에서 독립무장투쟁까지 했다는 그의 이력이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한글학자였다는 특이한 이력도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그를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그가 남긴 [깁더 조선어말본]이라는 저작을 만났던 것은 우연이었다.

80년대 중반 쯤, 전주에 갔다가 헌 책방이 눈에 띄기에 들렸다가 만난 책이었다.

“아 그 사람!”
두 말 없이 [깁더 조선말본]을 집어 들었다.

 

▲ [깁더 조선말본]. ⓒ홍광석

 

사실 나의 전공도 그렇다고 관심사도 아니었지만 오직 김두봉이라는 이름 때문에 소장하게 된 책이었다. 좀 더 훗날, [잊혀진 혁명가의 초상]이라는 제목의 김두봉에 관한 연구서적을 보면서 [깁더 조선말본]이 1922년 상해에서 발간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소중한 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깁더 조선말본]이 한글연구에 얼마만큼 기여했으며 또 가치 있는 책인지는 모른다. 이제 한글 연구에는 [깁더 조선말본]을 뛰어넘는 연구 성과들이 많이 나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때문에 한글학자들에게 [깁더 조선말본]은 학문적인 연구 자료로는 크게 소용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깁더 조선말본]이 지닌 역사적인 가치는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본다.

비록 [깁더 조선말본]의 저자인 김두봉이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지만 일제 강점기의 엄혹한 시대에 그러한 연구 성과를 책으로 묶었다는 사실,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일본에 무장투쟁을 벌였던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과소평가해서 안 될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비롯된 남북 분단.

그 분단과 이어진 비극적인 전쟁으로 인한 우리 민족이 당한 아픔과 고통, 그리고 전쟁은 끝났지만 남과 북이 오랫동안 상대방을 “괴뢰 도당”이라며 온갖 비방 속에 긴장관계를 유지했던 반세기의 역사를 모르는 국민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6.15선언으로 남북 교류가 확대되고 겨우 분단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가 싶었는데 mb정권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말았다.

남북 관계는 70년대 수준으로 후퇴하였고 갈등의 골은 어느 때 보다 깊어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북한의 광물자원은 중국이 싹쓸이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또 나진항도 중국에 내주었다는 소식이다. 이대로 가면 앞으로 북한 경제가 중국경제에 편입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민족 문제에 철학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었던 mb정부는 지난 5년 남북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지도 없고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CEO였음을 자랑했던 인간이 남북한의 경제 교류가 경제적으로 남북한 모두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정말 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선이 끝났다. 아직 당선인의 대북관을 모른다.

사리사욕에 어두웠던 mb 시대와는 달리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을 만난 사실이 있기 때문에 당선인의 대북정책은 mb보다는 유연할 것이라고 하지만 두고 봐야 할 일이다.

새로운 대통령이 남북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지는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개인적인 소견이지만 남북 관계의 개선이야말로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또 어려운 세계 경제에서 우리가 경제적 난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 내부의 감정적인 이념갈등의 그 모든 원인이 한반도의 분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정말 절실한 최우선의 과제라고 하는 것이다.

우선 당선인은 10.4 합의를 바탕으로 민간인들의 투자를 지원하고 북한 각지에 제2, 제3의 개성공단을 만드는 등 우선 경제적인 교류만이라도 확대하여 남북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차츰 비정치적인 분야의 민간 교류를 확대하여 통일의 초석을 쌓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정부의 주장과 다르면 무조건 종북 또는 좌빨이라고 낙인찍어 감정적으로 편 가르기 하는 사회분위기에 제동을 걸어주었으면 한다.

또한 새정부는 국내의 경제적 사회적 갈등의 해소에도 노력하면서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 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의 정치지형 변화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인수위에서부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입장 정리, 일본의 독도 침탈야욕에 대한 공동 대응방안을 검토하는 일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비록 독립 운동가이며 한글학자라고 하지만 이념적인 면에서 우리 사회에서 객관적 평가를 받기 어려웠던 인물이 쓴 책.

이제 우리도 한 인물에 대한 평가 척도를 이념을 넘어 개인의 치열한 삶과 업적을 중심에 두고 종합적으로 평가했으면 싶다.

한 개인이 이룬 업적일지라도 민족의 자산으로 지켜야할 가치가 있다면 남북한의 학자들이 토론하는 등 남북이 공유했으면 싶다.

이제는 사료일 수밖에 없는 한 권의 책. 통일의 염원을 새기며 [깁더 조선말본]을 다시 본다.

20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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