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1일 문수스님이 소신공양을 했다. 문수 스님이 쓰신 유서에는 '이명박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 이명박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문수스님과의 인연을 돌아보며 진관스님이 “문수스님의 자화상”이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문수스님 소신공양 1주기에 맞추어 진관스님이 불교와 역사를 고민하며 쓴 시들이 담담하게 담겨져 있다.

 

▲1993년 광주 지산동 미륵정사 진관스님 ⓒ진관예술세계


文殊의 自畵像

문수의 몸은 불꽃이 되었다. 하나 밖에 없는 몸을 불살랐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이미 고추를 달고 나온 것부터 알았다.
온 몸에 불꽃을 피우는 것을 좋아한 불꽃의 화신이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나무도 풀도 싫어한 알몸으로 옷을 만들고
불꽃 옷을 입기를 가장 좋아한 서원이었다.
또한 세상의 눈들이 싫어 깊은 산간에 살고자 했던 전생문수였다.
문수라는 이름을 얻기까지의 전생에 선업의 몸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그 커다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가 없다.
문수는 천하를 다 준다고 하여도 거부할 몸
문수는 세상을 그림이라도 그리려고 그랬다
아무도 말을 할 수 없는 육신의 불꽃그림
불꽃 속으로 들어가려는 문을 가장 싫어했다.
그래서 문수는 자연의 옷을 입고자 했다.
문수는 부처님의 가슴에 남아 있는 길상의 포상으로
그날을 기억하기 위하여 온 몸에 난 뿔 없는 새의 꿈으로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도솔천의 아름다움을 그리워했다.
본래 아름다움을 간직한 꽃은 피면서 미소를 보이지만 그 꽃은
문수가 그리워하던 그 꽃은 아주 피면서부터 당당한 몸이었다.

불교에서는 ‘분신’이란 일종의 깨달음을 초월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인간의 존재를 논할 때 자아완성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일을 2010년 5월 31일에 문수라는 이름을 지닌 스님이 분신을 결행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가장 큰 저항세력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박정희 정권하에서 노동자의 인권을 외치며 분신하였던 전태일을 생각하게 하고 또한 미국이 우리나라에 자행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대학생들의 분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자신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기로 작정하고 깊은 수련의 정진에 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무엇이란 말인가.

문수스님의 분신에 대한 역사성을 바르게 성찰, 설정하는 이론이다. 문수의 분신은 야당에서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것은 선거라는 국가적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기간에 있었던 일로 오히려 문수의 분신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제야와 논의를 하지 못하고 있었고 불교4대강 연대에서 문수스님의 분신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졌는데 문수스님의 분신 이후 육신을 서울로 옮기려는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다. 이러한 문제로 이목이 집중되고 있을 무렵에 문수의 분신에 정당성을 주장한 이들이 급기야는 조계종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문제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이래서는 아니 되는데 라고 생각을 하였지만 문제는 오히려 불교계에 확산되지 못하고 문수의 다비식이 3년간 정진하던 지보사에서 거행되고 문수의 몸에서는 사리가 30과나 나왔다. 그리고 문수의 육신을 4대강에 뿌리는 날을 정하고 낙동강, 금강, 영산강, 한강에 뿌리는 행사에 참여를 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문수스님의 실천성을 선전할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문수의 분신의 정신을 전하는 것은 시라고 생각하고 “문수의 자화상 이란 시집을 발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문수의 분신에 대한 정신은 불교의 발전을 예측할 수 있는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신라의 이차돈과 같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분신의 몸으로 가셨지만 분단 조국에 살고 있는 고통 받는 중생들의 행복을 위하여 문수는 두 손 모아 극락에서 염불하고 계시리라 믿으며 시집을 “문수의 자화상 이라는 제목으로 정했다 오늘도 문수의 염불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한국의 불교는 수행자들의 목숨을 소중히 지켜주는 일이다 중생들의 위선자로 살지 말고 미국이라는 오만한 권력 앞에 정치인처럼 굴복하는 나약한 불교가 되지 말고 다시는 문수스님 같은 분신이 없게 당당히 불교의 힘을 키우는 일, 그것은 수행자를 지키는 일이며 불교의 발전이며 불교의 전파, 불국정토를 염원함이다.(후기, 문수의 자화상 시집을 발간하며)


▲진관스님이 직접그린 유화로 장식한 진관스님의 시집<문수의 자화상> ⓒ문학공간 제공

 

 

時間의 저편에

시간의 저편에 내가 있다는 것을 기억이라도 하게나
언제나 말을 하고자 하여도 말할 수 없는데 '
말을 하려고 하면 부족한 것 같이 느껴져
그러나 이름 없는 이들이 있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렇지 않아
자꾸만 밀려오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말하지
말을 하지 말고 살자고 말해도 그것은 거짓
거짓으로 말을 하자는 사연도 있다.
저 들판에서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온다.
무엇을 위하여 그러한 장난을 하는지
아무리 기억을 해도 소용없군.
나의 존재가 다 無로 돌아가
나의 역사가 다 有로 돌아가
그러한 역사를 기록하게 하자
그것은 삼천 대천 세계에
날벼락을 치는 것과 같아
백기를 들고 일어나면 항복이라고 말했어.
고구려시대 을지문덕 장군이 그러한 작전을
그래서 고구려가 승리한 위대한 전쟁역사를 지니고 있어
신라의 진평왕 때 원광은 고구려를 항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신라의 진평왕에게 걸 사표를 썼다고.......
어리석기가 짝이 없는 자 이었어.
그것이 호국불교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로 호국은 아니지
실로 그뿐이 아니라 원효는 또 화쟁논을 썼는데
그것은 원효가 참회를 하기 위하여 화쟁논을
그것은 원효가 반성하고 참회하는 호전적인 참회문이야
원효가 고구려를 침략한 김유신의 졸개였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였던 것을 후회
그래서 참회문이 화쟁논이야.
그것을 몰랐다면 역사를 새로 공부하게나.
역사를 모르면서 참선한다면 그것은 참선이 아니야
간화선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허무한 소리
뜰 앞에 잣나무가 아닌데 잣나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병든 잣나무를 말하고 있는 화두 분명히
측백나무인데 잣나무라고 우기고 있는 한국의 산사들
아니다 도 거북아 아니다 조주도 잣나무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 나무는 오로지 뜰 앞에 있는 측백나무야 측백나무야 .

불교와 독재권력에 대한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할까한다. 그것은 이명박정권에게 소신공양을 하신 문수스님의 이야기와 너무도 닮았다

스님들이 소신 공양을 한 것은 베트남에서의 틱쾅득스님이 유명하다 1963년 6월 11일, 베트남전쟁과 독재정권의 불교탄압에 반대하며 몸을 태워 부처님께 봉헌한 베트남 고승 틱쾅득스님, 스님은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에서, 그것도 미국대사관 앞에서, 소신공양을 결행했는데 당시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면, 불길 속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정좌자세를 취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전한다.

그걸로 인해 미국이나 서방세계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고 베트남의 독재자 지엠 대통령의 친동생이자 비밀경찰 총수인 ‘응오딘누’의 부인 '마담누'는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까지 휘둘러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그런 '마담 누'가 승려들의 분신을 보고 "그래봐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바비큐들"이라는 독설을 외신기자들에게 퍼부은 것이 결정적인 악수가 되어, 이 망발은 보도를 타고 전 세계 언론을 경악시켰고, 이를 전해들은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으로 구성된 데모대가 매일같이 사이공을 휩쓸었다고 한다.

보다못한 미국은 지엠 정권을 밀어주는 게 헛일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미국은 그것이 베트남에서 자신의 앞날의 이익에 역작용을 일으킬 것을 크게 우려하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이 면밀하게 배후 조종한 쿠데타 소용돌이 속에 디엠과 누 형제는 11월1일 살해된다. 베트남전쟁 개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케네디도 11월 22일 겨우 1000일의 임기만 채운 채 암살되고 말았다.

틱 꽝 득 스님의 소신공양(분신 자살) 만큼 강력하게 현대 불교의 사회적, 정치적 특징을 드러내는 사건은 없다. 화염 속에서 죽어가며 좌선하고 있는 승려의 모습이 뉴스 통신사와 텔레비전이 보도하였고, 그에 연이어서 베트남에서 또 36명의 다른 스님들과 1명의 재가 여성 신도가 자결함으로써, 지엠정권에 대한 그들의 고통과 저항의 메시지를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겼다고 전한다.

틱광득 스님의 유체를 수습한 다음에 다비식이 거행되었는데, “틱꽝득 스님의 심장은 화염 속에서도 아무런 화상을 입지 않은 채로 움직였다”는 일화는 지금도 베트남에서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이다.

벌거숭이로 살아

벌거숭이로 살았다.
벌거숭이로 산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행복을 위한 삶의 기틀을 마련해야지
들판에타는 불꽃이 되었다.
언제나 미련을 가지고 산다면 처신하기가 힘들지만
언제나 미련이 없을 때에는 처신하기가 그리 어럽지 않아
어떤 이들은 항상 위선을 떨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러한 위선을 떨고 있을 때가 수행자로서는
어쩌면 더 행복해 보였다.
해인사의 팔만 대장경각에서 참회진언을 하고 있는 수행자
그들이 있기에 해인사에서의 침묵의 벽을 허물기도 하지
그러한 해인사만큼 우연한 사연이 있는 사찰도 없지
해인사가 말하기를 의상이 창건했다고 그러는데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라는 것은 화엄종을 찬양하기 위함이야
화엄종이 아니었으면 신라에 불교는 사상이 없어
그래도 해인사가 있기에 오늘의 불교를 말하고
미래에도 말할 수 있는데 해인사가 너무도
불교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못해
의상이 창건했다는 이름으로 있는 사찰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데
의상은 신라 말기까지의 존재함을 말함인데 그것은 신라후기의 불교가
가장 선전하기 좋은 의상의 불교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양이라는 것이었다.
그 대신에 원효는 요석공주를 만나서 그만 절단 났다.
하지만 원효가 없었으면 신라불교는 탑 밖에 없었는데
원효가 쓴 책이 있어 원효를 찬양하고 있지
그 위대한 저서를 썼던 것이 또한 요석공주의 덕이야
요석공주가 없었다면 설총도 없었다.
그런데 의상의 弟子는 1천명이 넘었고
원효의 제자는 10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바로 벌거숭이로 살았던
그러한 인연이야
그날에 진리라는 것을 말함이
아직도 전해내려 오고 있어
전해 내려온다는 것은
바로 역사여
우리의 역사는 벌거숭이 역사인데 이것을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가.
역사란 잔인한 시절의 모순을 지워 버리지 않는 것이 역사야
우리가 벌거숭이로 산다는 것은 또한 역사야
벌거숭이로 살아도 우리의 역사는 오직 문수
문수의 역사문수의 불교역사만이 존재해
그래서 문수는 역사를 만들고 있어
문수는 이차돈이가 되기도 하고
문수는 원효 의상이 되기도 해
문을 열고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둠 속에 나
나는 무엇인가 그토록 나를 그리워하는 인연
그 인연들을 모두 멀리하고 떠나간 사연
그 사연 하나만이 나를 울리게 한다.

현대의 한국의 불교는 너무 선에 치중한다거나, 중국의 불교를 그대로 답습하여 달마 만을 무조건 숭상한다거나 지금은 불교에서 조차 너무 친미적인 아류들을 보고 있다. 그것이 이땅의 고착화된 분단과 파시즘이라는 이명박정권과 무슨 상관관계에 있을까? 불교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불교의 불행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고려시대 태고 보우가 ‘태고암가’를 지은 다음에 원나라의 석옹청공을 찾아가 자기 시의 발문을 받기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가사부법을 전해 받았으며 그것이 오늘날의 조계종이된 임제종의 선맥이 이어졌다고 감히 말하고들 있다.  

문수스님의 시집을 읽고 있는데 어떤스님이 "무엇을 읽냐"고 물었다. 문수스님과 관련된 시집이라고 했더니 "그거 다 거짓말이야"라고 말한다.  

조계종이 이러고도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할 것인가? 스님들이 역사에 대한 바른 공부가 필요하다고 절절히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관스님의 시편들은 자주적 선시들로 티 없이 맑고 투명하다. 열반과 해탈로 어디에 얽메이지 않으려는 구도자, 수행자가 큰 나라를 섬긴다는(사대주의)는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말이다. 

오늘날 진관스님의 시편들을 자꾸 되새겨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빨리 잊어버리고 그리고 진실이 보도되지 않는 불행한 시대, 이러한 시대에 역사가 왜곡되어지는 현실들을 어떻게 대처할것인가? 

그런 시대에 문수스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진관스님의 시집 <문수의 자화상>은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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