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곤파스와 연이은 말루에 의해 농촌은 풍지박산이 났다. 과일 나무가 뽑히고 떨어진 과일들은 시체처럼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 속이 썩어 문들어지는 것이다.

올해는 폐농이니 내년을 바라보며 농부들은 다시 삽자루를 거머쥔다. 그러기를 몇 해였던가? 내년에는 하고 희망을 걸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보지만 거기엔 희망이 또 다른 고개로 넘어가고 말았다. 내년에는 내 년에는 하고 넘어야 하는 쓰라린 고갯길은 언제 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 가을 여행이나 한번 해 보면서 내일을 기약해 봄은 어떨지? 지금은 길이 좋아져서 옛길을 이용하지 않는데, 가끔은 옛길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을 더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중에 예전의 흥청거리던 휴게소가 바로 박달재 휴게소였다. 박달재의 구불구불한 지방도를 오르면 어지럽기도 하고 피곤하기도해서 휴게소에 들러 쓴 커피라도 한 잔 해야 하는 것이다.

▲ 박달재 고개에 세워져 있는 노래기념비. ⓒ한도숙

그러나 지금 박달재는 터널이 뚫려 그만 이삼 분이면 통과해버리니 박달재의 옛 영화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흥청거리며 종일 쏟아 내던 ‘천등산박달재’라는 노래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곳의 사연을 간직한 채 늙어가고 있는 몇몇의 사람들과 박달재임을 알리는 비석과 표석, 거기에 박달재의 명물인 남성 성기를 과장해서 만든 목각들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조금은 민망한, 그래서 여성들은 외면하려고하는 이 목각들을 고개에 배치한 사연들을 보면 보통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개에 대한 기본적 정서를 말해주는 듯하다. ‘천등산 박달재’라는 한시대의 국민들이 정서적으로 같이했던 유행가에서 보듯 사랑을 매개로한 이야기들이 숱하게 묻어있는 것이 고개이다.

끝가지 한 남자를 사모한 한 처녀의 원혼을 달래 박달재에 머물지 말고 하늘로 가라는 의미가 담긴 목각들은 그래선지 유난히 남근을 도드라지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디 박달재뿐인가. 이 땅엔 고개가 수도 없이 많아서 그곳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며 미워하며 떠나가고, 돌아오고, 언약을 하고, 기약도 없고, 뭐 그런 곳이다.

부모 자식 간이건, 연정을 나누는 남녀 간이건, 누구에게나 고개는 헤어짐과 만남의 회한이 어려 있는 곳이다. 농사를 천하의 근본이 되는 일이라 생각했으며 그러기에 밖으로 출타할일이 없었던 사람들은 고개가 정점이었다. 고개를 넘어가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과거를 보아 장원급제할 생각으로 고개를 넘는 선비도, 돈을 벌로 가는 사람도, 나라의 해방을 위해 중국으로 가 던 사람도,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던 생각으로 고개를 넘던 사람도, 꽃가마타고 시집가던 누이도 모두가 고개 너머는 미지의 세상이고 희망이 부풀어 오르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물론 고개를 넘어 바라던 희망의 세상을 만난 사람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고개 가 되겠지만 영영 불귀의 객이 되어 버리거나 다시는 쓸 수 없는 몹쓸 몸뚱이로 돌아온 사람에겐 눈물의 고개요, 불운의 고개, 회한이 쌓이는 고개가 될 것이다. 그래선지 우리민족에겐 사랑과 함께 한이 쌓이는 곳이 고개가 된 것이다.

사랑하는 님을 보내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부른 노래가 ‘아리랑’ 아닌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풀이에 의하면 아리는 아릿다운, 고운, 이쁜, 사랑하는으로 해석되며 랑은 한자인 신랑郞자이다.

곧 ‘님’인것이다. 어여쁘고 어여쁜님이 고개를 넘어간다는 말이다. 즉 자신과 이별을 하려고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속이 상한 나머지 붙들지는 못하고 가다가 발병이 나서 돌아오라는 비원을 하는 것이다. 그게 아리랑의 직접적 해석이겠는데 그 노래의 구절구절을 보면 다른 뜻이 내포된 것이란 해석들도 있다.

이토록 아리랑이란 노래는 우리들 정서속에 깊이 박혀있는데 그것은 사랑보다는 이별이며 다시는 못 볼 이별이 있는 것이다. 그이별의 장소가 고개인 것이다.

'비내리는 고모령'이란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이상하리 만큼 가슴을 짓누르는 애잔함과 먼지모를 애간장을 태우는듯 한 감정으로 눈물을 찍어내게 만드는 노래이다. 노래의 사연이 그렇다. 나라를 되찻으러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머니가 너무 사무쳐서 어머니 한번 뵈려고 고향에 내려 왔다고 한다.

▲ 박달재 고개에 얽힌 설화를 형상화한 조각품. ⓒ한도숙

그러나 아무리 조심했어도 누군가의 고자질로 왜경에게 잡히어 가게 됐는데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마침 고모령고개를 넘으려하는 아들의 손을 잡아보고선 한없이 서로 울었다는 사연을 노래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것이다.

세상이 참 많이 좋아졌다고들 한다. 단군이래로 잘 산다고 한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다고들 한다. 참으로 많은 어려운 고개들을 힘겹게 넘고 난 결과인 것이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 자살율이 높고 청년들이 취업이 않돼고 한반도 정세는 불안하다고들 한다.

아직도 넘어야할 고개 가 수없이 많을 것이고 그 고개를 넘으면 희망의 파라다이스가 있을 법이란 보장도 없다. 그중에서도 농업은 수많은 고개를 넘었다. 동학농민전쟁이 바라던 대로 49년 봉건적 토지지주제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낸 토지개혁은 많은 소작인들에게 희망과 빛을 주었다.

70년대 녹색혁명은 농민들을 춤추게 만들었으나 심화되는 산업화에 농촌은 병들기 시작한다. 농산물 수입개방시대로 접어든 우리농업은 이 땅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며 절름발이 농업이 돼버린 것이다. 이렇게 몇 고비의 큰 고개를 넘는 동안 농촌에 남은 사람은 늙은 사람들만이 남은 것이다. 더욱 현재와 같은 자유무역이라는 체제 내에서는 어떻게 농업을 부여 않고 고개를 넘어가야 할지 갈팡질팡할 뿐이다.

우리에게 고개는 넘어야할 존재였다. 그것이 님을 이별하고 도토리 묵을 싸서 넘던 고개든, 어머님의 손을 놓고 넘던 고개든,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을 개척하기위해 넘어야 했다. 그 고개는 넘고 나면 또 나타나는 고개이며 점점 더 험해지는 고개가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공간으로서의 고개는 이제 옛길의 정취로만 남아가고 있다. 그런 고개들은 우회되거나 터널을 뚫어서 다른 쪽과 연결시키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울며 불며 이별과 만남의 회한을 나누던, 사람의 운명을 가르던, 그런 고개가 아니라 지역과 지역의 넘나듬을 관장하는 지도상에 박제가 돼버린 고개로 남아 버렸다.

하지만 우리 운명을 가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고개는 수없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농업의 고개는 더욱도 험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들이 닥치고 있다. 한.미FTA, 한.EU FTA, 한.중 FTA등 우리가 현명하게 넘어가지 못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개들이 될지도 모른다. 박달재를 넘었던 선비에게나 고모령을 넘었던 독립투사에게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나 고개는 고비이며 운명이 변화하는 곳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한도숙님은 경기도 평택에서 배농사를 지으며 농민운동과 글쓰기를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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