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훈 전남 무안 약사사 조실스님, 시집 <툇마루 미소1.2.3> 펴내
김준태 시인, 각주 약력 발문 참여... "무애의 세계를 노랫말로"

흔히 불가에서는 깨달음의 세계를 물아일여(物我一如)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나를 바로 볼 때 우주만물 전체가 나와 똑같다는 말이다. 세상만물은 나와 다른 것이 아니다. 결코 나와 나뉘어져 있지 않다. 나와 함께, 아니 세상 모든 것들은 내가 되어 숨 쉬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래서 시를 '최고의 언어 결정체'라고 한다.

한국의 불교는 중국의 불교를 그대로 답습하며 '돈오돈수'만을 주장하다 학문을 멀리하는 폐단을 낳았다. '돈오돈수'란 한 번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수행을 닦을 것이 없다는 불교의 수행법을 말한다.

그런데 박경훈 스님은 '돈오점수' 즉 한번에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아직은 부족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부족함을 닦아 나가야한다는 의미를 말씀하시면서 원효의 화쟁사상과 무애사상을 넘나드는 시를 구도적 언어로 맑게 빛내고 있다.

▲박경훈 스님 시집. <툇마루 미소1.2.3>  

박경훈 스님의 시집에는 김준태 시인(조선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이 시에 각주를 달고, 연보정리와 발문을 썼다.

아래 글은 김 시인이 직접 정리한 박 스님의 살아온 길과 이번에 펴낸 선시집 <툇마루 미소 1.2.3>에 대한 소개, 그리고 스님과 김 시인의 대담내용이다. 

도서출판 '등등반야(등등반야란 말은 반야심경에서 가져온 말로 무등등한 평등세계, 마하반야 즉 ‘큰 지혜’를 뜻함)'에서 세 권으로 펴낸 이 시집은 410 편의 선시가 담겨있다. 스님 시는 원효대선사의 선불교, 거침과 막힘이 없는 ‘무애(無碍)’의 세계를 노랫말로 언어적 춤사위로 보여주고 있다.

박경훈朴慶壎 스님의 연보

속명은 박우령(朴牛令), 법호는 관허(貫虛), 시호는 춘동(春童). 1939년(기묘년) 전남 해남군 마산면 장촌리 375번지에서 태어나다. 경남대학교 문학부 종교학과를 졸업, 미국LA황제한의대 졸업, LA퍼시픽대학 대학원 보건학석사, 광주불교대학 대학원 교수.

16세 때 출가, 목포 달성사를 시작으로 목포 정혜원,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경주 법장사(주지), 진주 연화사(주지), 대구 보현사(주지)와 동화사(총무국장), 부산 장안사(주지)와 범어사(총무국장), 광주 증심사(주지) 등을 거쳐 현재 무안읍 성동리에 소재한 약사사(藥師寺) 조실로 계시다.

서남통합불교사암연합회장, 무안사암연합회장 등을 맡은 스님은 선시집 <아시게나, 우리가 선 이 땅이 낙원이라네/1.2권> (2001.역사비평사)를 펴낸데 이어 영문으로 옮긴 선시집 <Living Peace>(2004.미국 아이리스 출판사)를 간행.

한국선불교의 큰 봉우리인 ‘향곡香谷 스님’의 제자로서 선사상(禪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을 두루 껴안고 석가모니와 약사여래의 가르침을 실천행동으로 보여온 박경훈 스님은 신라천년을 일심화쟁(一心和諍)・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사상과 깨달음에 입각하여 닫힌 생각들을 혁파코자 무애의 춤을 추며 무애가(無碍歌)를 부른 원효대선사(元曉大禪師)를 추앙하며 따르는 회통불교의 선지식(善知識)이시다.
올해로 경훈 스님의 세속 나이는 72세, 법랍은 55년이시다.

1955년(16세) 음력 2월 8일 출가, 목포 달성사로 들어가 불도를 닦기 시작하다. 2 개월 후 목포 정혜원으로 옮겨 송만암(宋曼庵1876~1957) 스님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법명은 정화(定和). 송만암 스님은 조계종 제2대 교정을 거쳐 1954년 종정이 되신 분이다.4월, 화엄사로 옮겼으나 ‘대처․비구싸움’이 심각하여 2개월 후 이곳을 떠나다.

▲ 이번에 선시집 '툇마루 미소'를 펴낸 박경훈 스님.

1955년(겨울) 부산 금정구에 위치한 범어사(梵魚寺)로 가서 소임은 관음전 부전을 봤다. 19세가 되던 1958년 봄(4월)까지 만 3년을 범어사에서 공부를 했다. 범어 사에 계시면서 금정중학교, 해동고등학교를 주경야독을 통하여 졸업하다.

1959년(20세) 통도사(通度寺)로 옮겨 이곳에서 1년간 공부하다. 집중적으로 매달린 공부는 ‘금강경(金剛經)’이었으며 핵심은 ‘공(空)’이다. 이때 주지는 운허(耘虛) 스님이다. 1960년 가을 합천 해인사(海印寺)로 옮기다. 여러 스님들의 뜻을 모아 강고봉 스님을 다시 강주로 모시고 불교공부에 매진하다.

1965(25세) 4년제 대학 마산대학(현 경남대학)문학부 종교학과를 졸업하다. 한때 ‘시를 버려라’ 하면서 불교공부와 영어에 몰두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승무(僧舞)’의 시인 조지훈을 만나고, 공초 오상순의 시 ‘아시아의 밤’에 매료되다.

1965년 경주 법장사 주지로 있다가 진주 연화사(蓮花寺) 주지에 임하다.

1966년~1967년 대구 보현사 주지를 겸하면서 동화사(桐華寺) 총무국장에 임하다. 이때 경훈 스님은 동래 묘관음사(妙觀音寺) 주지로 계신 향곡香谷(1912~1978) 스 님의 상좌가 되다. 향곡 스님은 성철(性澈(1912~1993)) 스님과 같은 도반으로 한국불교에서 ‘선불교’를 이끈 대표적인 선승이다.

또한 향곡 스님은 ‘문자’를 통한 지식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일자무식 ‘선사상(禪思想)’의 상징이다. ‘지옥가기가 화살같이 빠르다’ 이것이 바로 선사상의 화두라고 경훈 스님은 강조한다. 향곡 스님은 동화사 조실, 성철 스님은 해인사 방장, 월산 스님은 불국사 조실, 서옹 스님은 백양사 방장 스님으로 한국불교를 지킨 거목이었다.

1967년(28세) 가을에 부산 장안사 주지 겸 범어사 총무국장에 임하다. 스님은 약사여래의 뜻을 좇아 중생의 질병치료에 불제자로서의 ‘하심(下心)’을 바치기 시작한다.

1970년(31세) 전남 무안군 무안읍 성동리 842-9번지에 약사사(藥師寺)를 일으켜 세우다. 약사사는 원래 고려 태조 원년(918)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 남악사(南岳寺)가 폐찰된 것으로 박경훈 스님이 선몽을 받아 절터를 복원, 중창을 거듭한 사찰이다.

1970년 겨울부터 40년간의 불사(佛事)를 통해, 나는 절을 다시 짓고 천년석불에 숨결을 불어넣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약사여래석불입상은 현재 ‘약사전’ 법당 안에 모셔져 있으며 대웅전, 칠불보탑, 사리전, 산신각, 용왕전, 만월당, 선열당, 범종각, 해탈문, 일주문 등을 건립하여 전통사찰로서 의젓한 가람으로 거듭났다.

1980년대 약사사 사찰을 두루 살피며 중창을 거듭하다. 미국 LA황제한의대를 졸업 후 LA퍼시픽대 대학원 보건학 석사과정을 졸업, 동 퍼시픽대학에서 침술학을 강의. 광주불교대학 대학원 교수로 활동하면서 각처 강연을 통해 포교에 나서다.

2001(62세) 선시집 <아시게나 우리가 선 이 땅이 낙원이라네>(1.2권)를 서울의 역사 비평사에서 간행하다. 이 두 권의 선시집 속에는 시 216편이 담겨져 있다.

2004(65세) 스님의 선시집에서 고른 작품들을 영어로 옮긴 시집 <Living Peace>가 미국 아이리스 출판사에서 발간, 큰 호평을 받다. 이 시집은 아마존닷컴에서 5개의 별을 받았다.

2010년(71세) 6월, 시집 <툇마루의 미소>(1.2.3권)를 ‘도서출판 반야등등’에서 펴내다. 이 시집은 경훈 스님의 410편의 자작 선시가 담겨있다. 

박경훈 큰스님의 ‘허허탕탕 무애(無碍)의 세계’

대담-“먼저 깨닫고 행하는 ‘돈오점수(頓悟漸修)세계’를 지향해야”

다음은 시인 김준태가 큰스님과 나눈 대담이다. 인터뷰에서 몇 대목 옮겨본다.

-경훈 스님께서는 16세 때 출가, 18세 때 견성見性(깨달음)의 세계에 진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죄송스러운 물음입니다만 그때 득도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범어사에 들어가 7일 동안 먹지 않고, 잠 한숨 자지도 않고 참선·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당시 부산 근교에 소재한 묘관음사(妙觀音寺)에는 주석으로 향곡香谷 큰스님이 계셨는데 나는 그분의 상좌승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향곡스님은 나의 큰 스승입니다.

내가 그때 자신을 내던지고 용맹정진하기로 결단하고 화두로 삼은 것은 ‘무(無)’였습니다. 영원히 소멸할 수 없는 참된 진리의 세계야말로 잘 잘못을 따지는 시비도 없고, 고뇌도 없고, 선과 악이 따로 없고, 불중생(佛衆生)도 없는 세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의 세계란 제로(0)의 세계입니다.

더할 수도 없고 더 빼낼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무란 무명(無明)의 세계이며 우주만물 일체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자비를 베푸는 대긍정의 세계입니다. ‘깨달음’을 의미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진리를 터득하고 행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마음을 둘로 나누는 서양식의 대립적이고 이분법적인 논리가 문제입니다. 나를 바로 볼 때는 우주만물 전체가 나와 똑같습니다. 세상만물은 나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와 나뉘어져 있지 않습니다. 나와 함께, 아니 세상 모든 것들은 내가 되어 숨쉬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인정하라, 나 아닌 것이 없다! 너를 인정하라, 너 아닌 것이 없다!’가 깨달음이며 ‘무의 극치’를 이룬 세계입니다.”

-스님, 그럼 여기 있는 된장과 고추장, 그리고 저기 창 밖에 서있는 나무들도 우리 사람들처럼 모두 눈, 입, 코, 귀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주만물 모든 것들은 이목구비가 다 달려있고 열려 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니까 세상이 시끄럽고 어지럽고 환경이 황폐해지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때문에 저는 우리 중생(인간)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깨우친 다음에 행하는 수행을 중시하지, 점오점수(漸悟漸修) 즉 차례대로 행하면서 나중에야 깨닫는 수행과정은 그 다음 순서로 합니다.

금(gold)은 금이라서 금이지, 닦고 윤택하게 손질한다 해서 금이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오점수야말로 가짜가 아닌 진짜인 금의 세계이며 의심할 수 없는 세계 즉 확연무의 그것이며, 영원히 생명을 편안하게 누릴 수 있는 안심입명의 세계입니다.”

-스님, 우리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바르고, 깨끗하고,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평화롭게 안정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여쭙고자 합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아인중생수자상(我人衆生壽者相)을 없애야 합니다. 즉 내 마음과 내 몸만을 고집하는 아상(我相), 상대방에 대하여 무수히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는 인상(人相), 중생들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는 중생상(衆生相), 자기의 목숨유지에만 급급하면서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는 수자상(壽者相)을 무너뜨려야 올바른 마음, 원기(태어날 때부터의 기운), 본기(본래의 기운), 정기(올바른 기운), 잡스런 찌꺼기가 아닌 진기(참다운 기운)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詩)를 던져라, 그리고 다시 詩를 만나라”

경훈 스님께서 본격적으로 시 창작을 시도한 것은 20대 초반을 넘어서면서부터인 것으로 엿보인다. 물론 출가하여 틈틈이 선시를 아니 쓴 것은 아니겠으나 승려로서의 불교공부와 용맹정진에 임할 때는 아무래도 시작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에 있어서 경훈 스님에게 최초로 충격을 준 사람은 공초 오상순(1894~1963) 시인이다. 아니 그의 시 <아시아의 밤>이다. 갑오동학혁명 혹은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난 그해에 태어난 공초 시인이 1922년에 발표한 이 시는 그야말로 엄청난 펀치력을 가지고 출가한 젊은 스님, 앞으로 시인으로 등단할 경훈 스님에게 충격을 준다.

일제 강점기를 통하여 너무나도 여성화된 조선의 문학에서 혹은 한국의 근대문학의 나약한 풍토에서 공초의 시는 단연 경훈 스님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불교적 세계관을 시의 바탕에 깔고 있는 공초 오상순의 시는 일단은 시적 에너지를 풍부하게 내장하고 있음은 물론 그것을 거침없이 내뿜고 있다. 이 시의 부제는 ‘아시아의 진리는 밤의 진리다’로 당당하게 남성적 목소리를 터뜨린다.

아시아는 밤이 지배한다 그리고 밤을 다스린다
밤은 아시아의 마음의 상징이요 아시아는 밤의 실현이다
아시아의 밤은 영원의 밤이다 아시아는 밤의 수태자이다
밤은 아시아의 산모요 산파이다
아시아는 실로 밤이 낳아준 선물이다
-공초 오상순 <아시아의 밤> 일부

열정, 그것을 잃지 않고 스님은 ‘시인의 존재’에 대하여 지금도 이렇게 말한다.
“던져라! 예수가 부처가 말하는 것을 던져라! 그것이 창작이다. 문학이 때로는 예수, 석가를 앞설 수 있다! 던져라! 그렇지 않으면 쓰지 말아라. 시를 던져라!”

경훈 스님께서 말씀하신 “던져라!” 하는 말과 “문학이 때로는 예수, 석가를 앞설 수 있다!”는 말은 패러독스, 역설이다. 던져라! 그것은 원효가 신라의 성골・진골, 교종세력이 쌓아올린 천년의 오소리티를 향하여 던진 말과 똑같은 말이다. 바위에 계란 던지기였으나 결국 신라 천년도 원효의 선종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닌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들의 시적 사유는 경훈 큰스님이 생이지지로 받아들여 확대 재생산시키는 ‘무애(無碍)’를 만난다. 거침없는 허허탕탕의 세계를 만난다.

무애정신(無碍精神), 혹은 무애시(無碍詩)의 신명성

큰스님의 시는 “봉(棒!)” “할(喝!)” “돌(咄!)” 커다란 사자후(獅子吼)로 터져 나오기도 하지만 근본은 그렇지 않다. 큰스님의 시는 궁극적으로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고, 물 흐르듯이 ‘선정(禪定)의 미학’을 따르고 있어서 읽는 이의 배꼽을 시원하게 긁어준다.

심신(心身)만 얄랑거려도 // 대천사계(大千沙界)에 //
피가 넘쳐난다 // 알겠는가 // 할(喝) -[최초의 질타] 전문


몸과 마음이 자꾸 흔들려도 바닷가 모래알처럼 무량무수의 세계에서, 큰스님은 무슨 놈의 피가 넘쳐나는 것이냐고 ‘할(喝!)’하는 고함소리로 죽비를 치듯이 꾸짖는다.

내 속을 텅텅 비웠습니다 / 비워야 만이 / 저 광활한 허공을 배울 것 같아 /
무조건 한통속으로 끝까지 비웠습니다 // 비우고 비운 끝이 어디 멜까 하고 /
한 칸, 두 칸, 세 칸, 또 비우다 보니 / 층층이 되어 / 나는 하늘만 쳐다보는 /
꼿꼿한 하늘지기가 되었습니다 -[대나무 속] 일부


시 <대나무 속>은 자꾸 읽어도 아름다운 시다. 하늘과 무조건 한통속으로 뻗는 대나무! 큰스님은 대나무처럼 비오는 날은 땅을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푹 수그리곤 하지만 결국은 “대지와 허공과 내가 한통속임”을 알았노라고 즐거워한다.

휘 휘 너울너울 / 춤을 추자 // 곤륜산 큰잔에 / 대해주(大海酒)를
마셔보자 // 허허텅텅 만세태평 / 진진세계 어우렀네 //...(중략)...
한통으로 사는 세월 / 아쉽기만 하다네 / 어허허 어허허 / 춤을 추자
-[한판을 벌려라] 일부

박경훈 큰스님의 시를 관통하는 것은 역시 ‘무애(無碍)’이다.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다. 원효대선사의 사상과 몸짓처럼 우선 둥글고 둥글다. 사물을 대하는데 있어서 돌려서 보지 않고 직관으로 본다. 그리고 낙천적 세계관 그대로이다. 구겨짐이 없이 호쾌하고 당당하다. 원효대선사가 표주박을 들고 춤추듯이 세상만사를 그 표주박 속에 넣어서 흔들어댄다. 그래서 마음에 우선 주름이 생길 수가 없는 것 아닌가.

하나인 / 하나는 / 하나 아닌 게 없다 // 사방이 부처요 / 시방十方이 원각도량일세 // 알겠는가 / 기와 조각 / 자갈들이 / 광체가 이글거린다
-[화엄시경] 전문


박경훈 큰스님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뒹굴고 있는 기와조각 하나, 돌덩어리 하나라도 보듬고 살려내려 한다. 아마도 이번 선시집에서 가장 빼어난 수작으로 보여지는, 큰스님의 사상과 부처님에의 공덕의 빛이 함께 스며들어가 있는 시 <화엄시경>에서 마지막 연은 그야말로 ‘광체가 이글거리는’ 시구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 하나 하나는 서로 하나가 되어서 둥글어지고, 그래서 사방이 부처요, 십방이 부처님도량이고, 깨어진 기와 조각 하나 하나도 빠짐없이 부처님의 자비를 받아서 광체가 이글거린다는 것이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탑을 쌓아올리고 사찰을 짓는 것만이 불사의 전부가 아니라면 이번에 3권의 선시집을 펴내시는 박경훈 큰스님의 시창작도 큰 불사(佛事)였노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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