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혁명 50주년 맞아 범국민장 "이제 한 많은 마산을 떠날 때" <뉴스 검색 제공 제외>

4.19민주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이 50년 만에 치러졌다.

11일 오후 1시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 50년 전 김주열 열사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올랐던 현장에서 '민주수호, 정신계승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이 열렸다.

▲ 11일 오후 1시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에서 '민주수호, 정신계승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이 열렸다.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당시 경찰이 시신을 빼돌려 고향 땅 남원에 가족 동의 없이 묻은 이후 지금까지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가 4.19민주혁명과 4.11마산민주항쟁 50주년을 맞아 추모사업회 등 시민사회단체들이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 장례위원회'를 발족해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국화꽃에 둘러싸인 김주열 열사의 영정 사진은 3.15의거, 4.19혁명에서 희생당한 186인의 영정사진 가운데 놓였다.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뿐만 아니라 186인의 4.19 열사들의 장례식을 공동으로 치르는 의미도 있다.

▲ 고인의 누나 김경자 씨.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이날 행사를 준비한 김영만 상임공동 장례위원장은 "3.15, 4.19 때마다 매년 간단한 추모제는 진행했지만 관도 제대로 없어서 열사들의 장례를 제대로 치른 역사는 없었다"면서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이지만 그 당시 현장에서 희생당한 분들의 합동장례를 치러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고 전했다.

남원에 있는 유가족들이 처음으로 마산에서 열리는 김주열 열사 추모제에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고인의 누나 김경자 씨는 "제 동생 주열이를 50년 전에 황급히 고향 선산에 그냥 매장하게 한 후, 어느덧 세월이 흘러 50년 만에 범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러주신 마산 시민 여러분들에게 눈물겹도록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고개를 떨궜다.

이어 "오랫동안 주열이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지만 오늘은 기쁘다"라며 "이 장례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과 주열이를 잊지 않고 지금도 이렇게 애틋하게 생각해 주시는 국민여러분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고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주열 열사 약력>

▲ 김주열 열사 학생 시절 사진(위). 1960년 4월 11일 마산 부두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떠오른 열사의 시신(아래). ⓒ김주열 열사 추모사업회
김주열 열사는 1944년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 9번지에서 3남 2녀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60년 경남 마산상업고등학교(현 용마고) 입학시험을 보기 위해 마산에 왔다가 3월 15일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두고 형 김광열과 함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 1차 의거에 참가했다.

이날 밤 8시 - 10시 사이 마산 시청 부근 남전 마산지점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산화했다. 경비 주임 박종표 등 경찰이 월남동 마산세관 앞 바다에 유기해 행방불명으로 처리됐다. 다음 날 아침 그의 형이 마산상고 합격증을 대신 찾았다.

이후 고인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가 행방불명된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마산 곳곳을 다니며 호소하면서 마산은 물론 전 국민이 김주열 열사의 행방에 관심이 집중됐다.

권 여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아들을 찾다가 남편 병세가 악화됐다는 편지를 받고 어쩔 수 없이 11일 오전 8시 30분 버스로 남원을 향했다. 권 여사가 마산을 떠난 지 3시간 후인 이날 오전 11시 30분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 바다에서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올랐다.

이로써 마산에서 4.11민주항쟁이 일어났으며, 이를 도화선으로 전국으로 번져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김주열 열사의 묘는 고향 남원과 서울 국립4.19민주묘지, 마산 국립3.15민주묘지 등 3곳이 있으며 이중 고향 남원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민주주의 지키기 위한 열사의 정신, 필연적으로 분단 극복으로 이어져야"

▲ 이날 범국민장에서 시민사회단체 대표, 마산 시민, 용마고 학생들이 참석해 고인의 영정 앞에 헌화했다.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이날 김주열 열사의 후배인 용마고(구 마산상고) 학생들을 비롯해 시민사회단체 인사 및 마산 시민 1,000여명이 범국민장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참가자들은 50년이 지나서야 고인의 장례식을 치르는 미안함에 먼저 머리를 숙이며 고인의 뜻을 현재에도 이어받을 것을 다짐했다.

박중기 추모연대 의장은 추도사에서 "어린 학생의 눈에 최루탄을 처박고 총질을 해놓고 50년 동안 사과도 하지 않는 철면피 같은 지도자들이 이끌어 온 사회"라며 "김주열 열사 앞에 운동한다는 우리가 스스로 죄인으로 좀 더 열심히 못해서, 우리가 게으른 탓에 이런 모양"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강실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는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은 단순한 추모식이 아니라, 다시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살리겠다는 결단이 함께해야 한다"면서 "권찬주 여사가 '주열이를 찾아 달라'며 마산 시내를 뒤지고 다녔던 간절한 어머니의 심정으로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와 통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올해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경술국치 100년, 4.19혁명 50주년, 광주민주항쟁 30주년, 6.15공동선언 10주년이 되는 해라는 점을 강조하며 "항일독립투쟁의 뜻이 4.19혁명 때 희생당한 열사의 뜻으로 이어지고 광주항쟁으로, 6.10 항쟁으로 이어졌다"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신은 필연적으로 민족의 분단을 넘어서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며 이것이 김주열 열사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무학산 석봉암 월봉 스님은 "4월 혁명의 불을 지폈던 김주열 열사가 50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마산의 앞바다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죽음으로 왔고 이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며 "부디 극락왕생하여 이 나라와 민주성지 마산을 지켜주기를 진심으로 기원드린다"고 기도했다.

3.15의거탑까지 이어진 노제 "이제 한 많은 마산을 떠나야 할 때"

▲ 마산 3.15의거탑 앞에서 노제를 마무리했다.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범민국장은 노제로 이어졌다. 운구행렬은 3.15의거 당시 시민들과 경찰이 충돌했던 마산 시청 앞, 고인의 시신이 안치됐던 구 도립병원(마산의료원), 최루탄을 맞아 쓰러졌던 구 남전 마산지점 앞을 지나 3.15의거탑에 이르렀다.

'열사정신 계승하여 민주주의 수호하자', '열사정신 계승하여 동서화합 이룩하자' 등 수십 개의 만장을 선두로 김주열 열사의 영정과 상여가 뒤따랐다. 4.19민주혁명 희생자 186인의 영정이 그러진 만장 물결도 이어졌다.

마산 시민들도 인도로 나와 안타까운 심정으로 운구행렬을 지켜봤다. 상여에 노잣돈을 묶어주며 눈물을 흘리던 박옥자(58, 마산 중앙동) 씨는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서 총대든 경찰들과 싸워야 했던 것이 마음 아프다"라며 "세상에 자식 가진 부모라면 다 알거다. 50년이 지나도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냐"라고 말했다.

선배의 장례식에 만장과 영정사진을 들고 참가한 용마고 학생들도 "안타깝지만 선배들이 자랑스럽다"라며 소회를 전했다. 용마고 1학년 김재현(17) 학생은 "우리하고 같은 나이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운구행렬이 3.15의거탑을 둘러싼 채 마지막 노제행사가 이어졌다. 이경희 민생민주연대 공동대표는 "김주열 열사가 이제야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고 고향 남원으로 가게 됐다"면서 "한 많은 마산을 떠나야 할 때"라고 고별사를 했다.

김주열 열사의 운구는 마산 시민들을 뒤로 한 채 유가족과 함께 남원으로 향했다.

"친구의 장례 치러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
<미니인터뷰> 김영만 4.11민주항쟁 50주년 행사준비위원장

▲ 김주열 열사 유가족과 함께 있는 김영만 4.11민주항쟁 50주년 행사준비위원장(맨 왼쪽). ⓒ통일뉴스 정명진 기자

□ 통일뉴스 :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을 50년 만에 치르게 된 이유는?

■ 김영만 위원장 : 50년 전에 경찰에게 시신을 탈취 당해 그 당시 김주열 열사의 장례를 못 치렀다. 마산 시민들은 당연히 장례식을 치를 줄 알았는데 시신을 탈취 당하자 마산 시민들도 애통해 하고 분개했다. 그 이후 민주화가 제대로 안 되고 역행하면서 그냥 지나쳐 왔다. 매년 작은 규모의 추모식을 진행해 왔지만 늦게라도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러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 고등학교 입학 동기의 장례식을 치러준 개인적인 심정은?

■ 이 장례식은 언젠가는 누군가가 꼭 치러야 할 장례식이었다. 제가 친구로서 치르게 된 것이 참, 마음 한편으로 뿌듯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다.

□ 186인 4월 혁명 열사 영정과 함께 모신 이유는?

■ 사실 1960년에는 다들 가난한 시절이어서 제대로 장례를 치른 역사가 없다. 관도 제대로 없이 장례를 치렀다. 이번 범국민장을 계획할 때 행사 이름은 김주열 열사 범국민장이지만 그 당시 현장에서 희생당한 분들과 합동장례를 치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노제할 때 186분의 영정도 만장으로 함께 나간다.

□ 이번 장례식의 메시지는?

■ 3.15의거는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범국민장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로 되었으면 좋겠다. 일상적으로 별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잊게 된다. 대한민국이 이 만큼 된 것도 이러한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에 큰 의미를 뒀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찾기도 힘들지만 지키기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 50년간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피 흘린 숱한 역사가 많다. 앞으로 피 흘리지 않고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안은 없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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