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숙 첫 개인전
푸른꽃 - 중심에서 묵묵히 밀어 올리는 그림의 힘 
2009.7. 11(토) - 7.25(토) 5.18기념문화센터 1층 전시실
2009. 7. 11(토) 오후 4시

1. 내면 깊숙한 상처

이혜숙은 전라도 영암출신 작가이다. 그곳은 영산강을 낀 너른 들녘과 험준한 월출산이 잘 어울려 그 풍광이 무척 아름다운 고장이다. 특히 월출산의 산세는『擇里志』의 저자 李重煥(1690-?)이 '불꽃처럼 바위가 하늘로 치솟는다'라고 감탄할 만큼 대단히 인상적이다.

지금으로부터 6,000만 년 전쯤에 전체의 폭 20km에 길이가 10km쯤 되는 거대한 화강암덩어리의 일부가 솟구쳐 형성된 산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보는 월출산의 기세와 절경은, 억겁의 세월동안 거대한 화강암덩어리를 대지 위로 밀어 올린 보이지 않는 중심의 힘에 힘입은 것이다.

▲ 오래된 기억. 이혜숙
▲ 아침. 이혜숙
이혜숙의 작품에서 하나같이 결코 만만치 않는 저력이 감지되는 것도, 그네가 월출산 자락에서 나고 자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월출산의 절경이 오랜 세월 내면 깊숙한 저력에 힘입은 바라면, 우린 더욱 가슴이 아련해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그 무엇이, 마그마가 터지듯, 거대한 화강암덩어리를 너른 영암의 들녘 한복판에 800미터가 넘는 산으로 솟구치게 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다.

비록 보이진 않지만, 그 끈질기고도 거대한 중심의 힘을 상상하면, 예부터 작은 금강산이라 불릴 만큼 빼어난 월출산의 산세도 초라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묵직한 감동을, 작가의 블로그에 실린 작품과 작업일지를 살펴보면서, 다시금 느끼게 된다.

이혜숙의 유년시절은 또래의 아이들에 비하여 다소 쓸쓸하고 외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수업을 하다가 가끔 내가 서있는 자리가 신기할 때가 많다. 학교 다닐 적에 난 지독히 도 내성적이고, 낯설음도 많이 타서 친구도 많지 않은 열등감으로 소심한 아이였었다. 이혜숙 <나와 그림>

1960 · 70년대 우리의 농촌이 그러했듯, 그네 역시 집안사정이 어려운 편이었다. 때론 가족과 떨어져 홀로 외갓집에서 지내야 했다. 동네친구가 없어 혼자 흙 마당에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하늘 높이 솔개가 보이면 무섬증에 뒤안으로 숨던 단발머리 소녀, 지독히도 말 수가 적고, 자신의 타인이 되어 자신을 추슬러야한다는 것을 세월보다 어린 몸이 먼저 익숙해진 아이였다.

이혜숙의 고교생활도 마치 초점이 흐린 흑백사진 같은 시절이었다. 남달리 공부를 잘했기에 인문계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정형편으로 영산포여상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원치 않는 학교로 진학하면서 이혜숙은 세상이란 자신이 살고 싶은 데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고 한다. 영산포. 영암과 달리 영산포는 훨씬 분주했으며 또한 비좁았고, 포구에선 홍어의 삭힌 냄새가 넘쳐났다.

일제강점기로 뒤틀린 우리 근· 현대사가 주홍글씨처럼 내면 깊숙한 곳에 새겨진 영산포는 걸핏하면 나주와 비교되면서 역동성과 열등감이 교묘하게 뒤섞인 정서로 넘실댔고 그네를 휘감았다. 이처럼 영산포가 그네에게 절망의 나락이었으므로 설마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되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클럽활동 부서인 미술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미술선생님이 매우 열심히 지도하셨다. 날마다 미술실에서 그림을 가르쳐주시고 야외스케치며 미술대회도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 어릴 때부터 낙서하기나 그리기를 좋아하였으나 특별히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는 그림의 세계에 들 어서게 되었으며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어 지금의 미술선생님이 되었 다. 날마다 그림을 그려야 됨에 때론 싫증을 내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난 그 시간들이 참 좋았다. 이혜숙, <나와 그림>

▲ 느티나무 학교. 이혜숙
▲ 새벽. 이혜숙
영산포여상 미술반 활동을 통해서 이혜숙은 그림의 세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자신과 세상이 관계 맺고 함께 이야기 나눌 미술이라는 창구를 발견한 것이다. 졸업 후 그네는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림을 토대로 ‘딛고 있는 땅이 수렁같이 느껴졌어도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반면에 사범대학 시절에 교사라는 직업은 전혀 이혜숙의 안중에 없었다.

오직 화가의 길만이 유일한 미래로 여겨졌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의 고민과 함께 예술은 사회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대학시절이었다. 그만큼 이혜숙의 작가로서의 재능은 동료 중에서도 빛났으며, 작업을 향한 열정도 뜨거웠다. 하지만 누군들 어찌 아니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네와 같은 유년시절과 고교시절을 지냈더라면. 그러나 이것은 일견 사실이면서 또한 사실이 아니기도 하였다. 졸업 이후 이혜숙이 보여준 교사와 작가로서의 삶 속에서도 거듭 확인되지만, 실상은 대학시절에도 그네는 결코 현실에 대한 따스하며 낮은 시선을 거둔 적이 없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학시절 두 은사의 영향이 컸다. 학부에서 신경호(현 전남대 교수), 이태호(현 명지대 교수)를 만났고, 두 분을 통해 우리미술, 우리역사, 우리 땅, 우리 민중의 삶과 현실이 결코 예술과 무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작가는 시대를 기억하고 증언하며 표현해야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힘들 때면 두 은사의 말씀을 떠올리며 세상과 호흡하며, 세상의 새벽길을 외면하지 않을 용기를 얻는다고 작가는 말하곤 한다. 무서움도 두려움도 몰랐을 적에도, 하고 싶은 일보다 하지 못한 일을 먼저 헤아려보게 된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네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하며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림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그리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고 있다.

2. 愚公移山(우공이산)-화가의 길

이번이 이혜숙의 첫 개인전이다. 20여년의 작업을 한데 모으니 대략 120여점이 넘는다고 한다. 습작이나 기타 망실된 작품까지 더하면 그 수량은 훨씬 많을 것이다. 단점처럼 보일만큼 작업속도가 유난히 더딘 그네의 작업방식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작품이 수준작이라는 사실이다. 대충대충 그린 작품이 하나도 없다. 서툴면 서툰 데로 작품 하나하나에서 모두 시대의 숨결이 느껴진다. 심지어 동료작가가 그네의 대학시절 작품 서명을 보면서, “언니는 싸인도 꼭 80년대처럼 했네”라고 말할 정도이다. 이것만으로도 이혜숙이 얼마나 치열하게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고자 노력했는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 연화- 하의도. 이혜숙
이혜숙의 작업은 '우공이산'의 고사를 연상케 한다. 주지하듯 우공이산은, 나이가 90에 가까운 노인이 둘레가 700 리나 되는 큰 산 때문에 왕래가 불편하자 어처구니없게도 산을 옮기리라 결심하고 흙을 퍼내기 시작했는데 옥황상제가 감동하여 산을 옮겨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옥황상제가 산을 옮겨주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공은 그야말로 미치광이 노인으로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므로, 우공이산의 핵심어는 '愚公'이 아닌 '移山'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어찌 '우공'이 없이 '이산'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산은 모름지기 우공으로 말미암은 일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고사의 핵심은 우공이 둘레가 700 리나 되는 거대한 산에 압도되기는커녕 흙을 퍼 옮기기 시작한 그 당당한 무모함에 있다. 우공 이전부터 그 산은 있었고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산을 빙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들이라고 태형과 왕곡 두 산이 불편하지 않았을 리 없었을 터인데, 우공 이전에 그 누구도 산을 옮기려하지 않은 것이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미친 짓이었으므로. 그런데 우공은 아랑곳없이, 친구 지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이산의 꿈을 포기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결코 멈춤이 없는 역사의 힘에 대한 믿음을 피력하면서. 그리고 이 부분이 우공이산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옥황상제의 선물로 주어진 '이산' 의 성공신화가 거북하다. 성공신화 보다는 무모하리만치 시대와 기꺼이 不和하려는 것이 작가의 본령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밤을 새워 토론을 하고 일주일을 꼬박 지붕에서 세웠다. 무서움도, 두려움도 몰랐다. 오로지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렸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는 세상이 바로 올 것만 같았 다. 이혜숙, <흑산도 천주교회 벽화>

위 기록은 작가가 흑산도 천주교회 지붕에 벽화를 그렸을 당시를 회상한 것이다. 밤 새워 토론하고 일주일을 쉼 없이 작업하면서도, 무서움도, 두려움도 모르는 작가의 뜨거운 심장. 오로지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리는 작가의 정직함. 그리고 우리가 그리는 세상이 바로 올 것만 같았다는 낙관의 신념은 우리에게 대단한 감동을 준다.

물론 1980년대 그들의 바람처럼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바로 오지 않았으며, 여전히 세상은 비관적이다. 어쩌면 그림을 통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은 우공이 산을 옮기겠다는 것만큼 허황된 짓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오늘 60여점의 작품을 세상에 내 놓았다. 그러니 어찌 이혜숙을 우공과 같다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혜숙과 같은 작가가 바로 우리 시대의 '우공'인 것이다.

3. 푸른 꽃
▲ 네가 그리운 시간. 이혜숙
이혜숙의 지난 그림들을 살펴보니, 지난 20여년의 우리 현대사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마치 낡은 사진첩들을 꺼내어 옛 친구의 얼굴을 보는 듯싶다. 혹은 오래된 나뭇결을 손바닥으로 쓰다듬는 느낌이다. 그렇구나! 어느 노랫말처럼, 붉은 눈물 붉은 피 흘리며 동지를 빼앗기던 시절도 있었지.

그렇구나!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던 시절도 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길이었기에 오히려 두 눈은 더욱 빛났고, 칼끝 같은 벼랑을 넘어야했기에 의식은 더욱 명료했으며 가슴은 더욱 담대하였다. 그네의 작품을 보면서, 비로소 작가의 눈이 시대의 눈이라는 옛말이 참말임을 알겠다. 예술의 본령이 시대와 호흡하고 증언하는데 있음을 실감하겠다.

84학번인 작가의 대학시절 그림에서 이제 막 어슴새벽의 계단을 오르려는 한 사람이 보인다.<푸른 계단,1987> 언제 태양이 떠오를는지 알지 못하고, 그 끝은 어디일지 누구도 묻지 않지만, 밝아오지 않는 아침은 없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가슴에 품고 길을 떠나는 것이다. <자화상,1987> 1989년 2학기에 이혜숙은 강화여중에서 미술교사로 첫 걸음을 시작한다.

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으로 1,500여명의 교사가 막 해직된 직후였다. 그때의 긴박함과 팽팽한 긴장감이 <교육이라는 이름의 신화>(도판 04)에 선명하다. 이듬해 이혜숙은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의 오월전 《10일간의 항쟁, 10년간의 역사, 남봉미술관, 광주》에 1980년 <서울의 봄, 200호>을 출품함으로써, 민중미술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 老 목수의 꿈. 이혜숙
이후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의 정기전인 《오월전》《삶의 현장전》에 민중의 삶과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들을 꾸준히 내놓았다. <일을 마치고,(1990) / 붉은 노을, 봄빛(1991) / 언덕에서, 아버지의 땅, 새벽, 아침, 선식이 성(1992) / 빈시간, 봄날, 아이들 연작, 오누이, 아이, 엄마의 호박(1993) / 옥수수, 갈아엎는 땅, 저녁노을, 해풍(1994) / 한솔이, 어머니(1995)>. 그중에서 특히 '동학혁명100주년기념미술제'(황토현에서 금남로까지, 1994,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우루과이라운드협상 반대시위를 위해 새벽에 길을 나서는 농민의 결연한 의지를 담은 작품은<새벽>(도판 07), 치열한 작가정신과 예술적 형상화가 돋보이는 이혜숙의 역작으로서, 1990년대 우리 민중미술운동의 대표작으로도 전혀 손색없는 작품이다.

1990년대 전반 이혜숙의 작품에는 연극무대처럼 인물의 심리나 상황을 반영하는 역할로서 풍경을 설정하는 경향이 많이 보인다. 이것은 서사적 방식을 취함으로써 시대를 증언하고자 한 1980․90년대 민중미술운동의 일반적 경향과도 맥을 같이 한다.

즉, 당시 민중미술작가들은 - 신학철이나 임옥상의 경우처럼 - 은폐된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상호 모순되는 장면을 한 화면에 병치시킴으로써 파생되는 시각적인 충격을 통해, 기득권에 도전하고 은폐된 현실을 폭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혜숙의 경우에는, 적대적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소재를 취하기보다는,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상호수용의 관계로 인물과 풍경의 관계를 설정하고 민중의 삶과 현실을 형상화했다는 점이, 동시대의 민중미술작가와 다른 중요한 차이라고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네의 작품에서 인물과 풍경, 서사와 서정은 상호수용의 관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 전반기까지 이혜숙의 눈길이 인물에서 풍경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져간다. <미루나무, 생명나무(1997) / 누가 우는가, 빈집 연작 (1998) / 뿌리 뽑힌 나무, 다시 시작(1999) / 두 갈래 길, 미루나무 길, 상처, 진달래(2000) / 들, 엉겅퀴 피는 언덕, 아침 강, 겨울 강(2003)>. 1997년 광주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2회 통일미술제》에 출품한 <생명나무>(도판 13)는 봄날 광주시 칠석동의 은행나무를 그린 작품이다. 수령 800살, 높이 26미터, 둘레가 6.47에 이르는 이 거대한 은행나무는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 꿈꾸는 섬- 하의. 이혜숙
마을사람들도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이 나무에 제사를 지내고 그 유명한 칠석동 고싸움놀이를 벌인다. 즉, 너무나도 풍부한 민중의 서사가 칠석동 은행나무에 담겨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혜숙은 이 은행나무를 어떠한 서사의 차용도 없이 오직 나무의 존재 그 자체로만 만나고자 했으며, 생명나무라 이름 불렀다.

그런데 이 서사 없는 서정으로 하여 우리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서사를 상상할 수 있게 되고 보이는 서정은 더욱 깊어진다.

마치 월출산을 밀어올린 보이지 않는 중심의 힘처럼. 이러한 경향은 완도군 신지 섬 바닷가의 방풍림을 그린 <누가 우는가>(도판 09), 사람들이 도시로 떠난 <빈집>, 도로확장공사로 <뿌리 뽑힌 나무>(도판 11), 담양 용면의 <두 갈래 길>, 전지 작업으로 잘려나간 가로수에 돋는 연초록 이파리<다시 시작>(도판 14),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겨울 강>, <들>(도판 21), <엉겅퀴 피는 언덕>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었다.

이혜숙은 '서사'의 민중미술작가에서 아름다운 '서정'의 화가로 변모한 것일까 만약 누군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미안하지만 작품을 오독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앞서 이혜숙의 작품에서 인물과 배경, 서사와 서정은 상호수용의 관계라 말한 바 있다. 이제 갓 교사생활과 민중미술운동에 나선 청년작가의 매서운 눈에 비친 조국의 현실과 민중의 삶은 참으로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원래 굳이 화가가 아니더라도 젊음은 그 사실만으로도 치열하게 세상에 대해 따지고 싶은 나이가 아니던가? 게다가 민중미술운동에 나선 작가들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세상을 변혁하고자하는 의지로 충만한 청년들이었다. 이혜숙의 초기 작품에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서사적 얼개가 선호된 이유도 그러했을 것이다.

▲ 그리움은 별이 되어. 이혜숙
그러나 '무서움도 두려움도 모르고 오로지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렸' 고 그들이 '그리는 세상이 바로 올 것만 같았'지만, 세상은 변혁되지 않았다. 여전히 싸움은 계속되었고 그 끝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즈음에 많은 민중미술작가들이 번뇌했고, 갈등했으며, 혼란스러워했다. 이 과정에서 동력을 잃은 민중미술운동조직도 많았고, 조직에서 벗어나 작가적 전망을 모색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할 때 이혜숙은 그동안 서사의 뒤에 물러나 있던 지극히 평범한 풍경들 - 언덕, 들판, 강물, 나무, 풀꽃, 길- 에 주목함으로써 그 대안을 모색했던 것 같다. 이것은 그네의 회화 언어가 상호모순 보다는 상호수용에 가깝다는데 따른 귀결이었다. 따라서 이혜숙의 서정은 아름다운 풍경의 찬미가 아니다. 그것은 싸움을 끝낸 후 더 큰 싸움을 준비하기 위하여 팽팽해진 활시위를 늦추는 서정이었다. 새로운 연주를 위해 거문고의 줄을 更張하는, 서사를 잉태한 母情의 서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생각보다 심한 고통을 감내해야하는 길이었다. 2004년부터 약 2년 동안 이혜숙의 작품에서 그러한 고투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행복을 꿈꾸다 연작, 老 목수의 꿈, 목수의 초상 연작, 꽃등, 아지랑이(2004), 맨드라미, 엉겅퀴, 자화상, 얼굴-기억 연작(2005)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가를 꿈꾼다 1․2(2006)>. 2004년에 제작된 연작<행복을 꿈꾸다_거울을 보며, 벚꽃아래서, 황사, 낯선타인, 가족>(도판 31․32)를 보노라면 마치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든다.

화사한 벚꽃아래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기념사진을 찍는데 정작 그녀는 그림자처럼 무채색의 존재이다. 가족사진에서도, 화장을 지우는 모습에서도 자신에게조차도 낯선 타인일 뿐이다. 그네의 존재는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아내로서, 교사로서, 화가로서 그 어느 것도 명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황사가 가득한 거리처럼. 그 지독한 고독과 아픔, 상처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는 화가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가를 꿈꾼다 1․2>(도판 30). 장장 5미터에 달하는 이 그림 속에는 작가의 지난 삶이 이야기그림책처럼 펼쳐져있는데, 이는 긴 터널이 끝나간다는 조짐이었다.

▲ 붉은 노을. 이혜숙
이혜숙의 활동재개는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강사로 참여하면서 비롯되었다. 지방문예회관특별프로그램인 '게릴라아트버스 마을벽화그리기'(2005), '부모가 들려주고 아이들이 만드는 이야기그림책'(2006), '학교-지역사회연계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소쇄원 48영 시화집 출판'(2007) 등이 그것이다.

광주민예총, 미술인연대, 놀이패 신명 등과 함께 광주, 전남, 전북 등지에서 학생, 지역사회 주민, 동료작가 들과 함께 펼친 이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 활동을 통해서 이혜숙은 건강한 자양분을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2007년 파릇한 남․녀 중학생의 전신상을 그린 <사춘기>를 신호탄으로 다시 이혜숙의 왕성한 작품 창작이 재개되었다.

2008년 3월에 담양에서 전남 신안군 하의중학교로 부임지를 옮기게 되는데, 그곳에서 그린 작품이 20여점에 이른다. <별을 바라보다, 햇살, 형철이, 꿈꾸는 섬 하의, 소금 꽃, 첫 소금 오는 날(2008) / 오래된 기억, 느티나무학교, 蓮華-荷衣島, 푸른꽃 연작, 네가 그리운 시간, 소쩍새 우는 밤, 황혼, 그리움은 별이 되어, 달빛, 네가 오는 동안, 봄똥, 봄날은 간다(2009)> 따라서 생활근거지의 변화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인다.

작품의 전체적인 색조도 맑고 투명해졌다. 하의도 주민의 수 백 년에 걸친 농민항쟁의 역사, 소금밭의 고된 노동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마치 운동선수가 온 몸에 힘을 빼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듯, 작품을 그려나갔다. 그래서인지 회화적 완성도가 한결 나아졌다. 무엇보다 보기 편하고 부담감이 없어졌다. 그러면서 가슴에 와 닿는 따스함이 있다. 좋은 작가에 좋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또한 회화적 언어에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대상을 대상 자체로 존중하고 수용하려는 태도가 엿보인다. 예컨대 전북 김제군 봉남면의 느티나무를 그린 <오래된 기억>(도판 12)과 <느티나무학교,100호>(도판 05)에서 그러하다. 천연기념물 제280호인 봉남면 느티나무는 높이 15미터, 둘레가 8.5미터에 수령이 600년이다. <느티나무학교>는 전남 담양 군 대전면 한재초등학교와 교정의 느티나무를 그린 것이다.

이 느티나무 역시 천연기념물 제284호로 높이 26미터, 둘레 8.31미터에 수령은 600년이라고 한다. 이혜숙은 일체의 군더더기도 없이 대상 그 자체의 진실만을 드러내는데 천착하였다. 그런데도 그림이 주는 울림은 더 크다. 마음을 열고 대상을 온전히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작은 하의도 연작이라 할만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하다가 스냅사진을 찍듯 그린 소품들에서 작가의 건강함을 느낀다. 화면도 빠른 필치로 자연스럽게 구성하였다. 바닷가의 자귀나무 꽃<네가 오는 동안>, 어스름 하의면 풍경<네가 그리운 시간>, 하의도농민항쟁관의 죽은 소나무 <황혼>, 중학교 소나무 숲<소쩍새 우는 밤>, 가정방문 길에 만난 감자 꽃<그리움은 별이 되어>, 하의도의 <달빛>, 송화 가루가 날리는 <봄날은 간다>, 그리고 긴 겨울을 이겨낸 <봄똥>에 이르기까지, <행복을 꿈꾸다-낯선 타인>의 분위기를 일신한 작품들이다. 그래서 무척 다행이다. 작가도 긴 겨울을 잘 견디었다.

그네에게도 싱그러운 봄똥향내가 난다. 특히 우리의 옛 지도 방식을 차용한 <푸른꽃-하의도․상태도․하태도>와 紅蓮의 꽃술처럼 하의 3도를 배치한 <연화-하의>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작가로서의 지평을 열어가는 모습도 확인하게 된다. 무척 반가운 일이다. 우리 미술이 여전히 건강하고,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어서 화가 이혜숙에게 무척 고맙다. 그네가 우리 시대의 아름드리 느티나무화가로 성장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진실을 담고 있어야 하며
삶의 질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림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그리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이혜숙의 작업일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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