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박물관 활성화, "수장고 중심 탈피해야"

(파묵칼레=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이오니아식? 그러고 보니 '이' '오'처럼 생겼네요."
아나톨리아 반도 서남부 내륙에 자리잡은 저명한 계단식 석회암 온천지대인 파묵칼레(Pamukkale) 인근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란 고대도시 유적을 훑어보면서 심광주 토지박물관 팀장과 기자가 나눈 대화 한 토막이다.

기원전 3세기에 페르가뭄(Pergamum) 왕국의 유메네스(Eumenes) 2세가 이 왕국의 전설적 창건자인 텔레스의 아내 히에라(Hiera)의 이름을 따서 건설했다는 이 유적지에는 서양미술사 개설서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오니아식 건축물의 부재들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서양 고대건축 양식을 말할 때면 항용 도리아식, 코린트식과 함께 병칭되는 이오니아식 건축물은 교과서적인 특징으로 소용돌이 모양 기둥머리 장식을 거론한다.

국내 미술사학계나 고고학계에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와권문(渦卷文)이란 요상한 이름을 붙이곤 하는 이 소용돌이 문양은 지역적으로는 그리스 동부지역과 에게해 섬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거의 예외 없이 대칭을 이루는 그 소용돌이 문양을 보니 흡사 '이' '오'라는 두 한국어를 표현한 것만 같았다.

터키 곳곳에 남은 그리스-로마시대 유적지라면 어떤 곳이건 이런 이오니아식 건축물 부재와 함께 코린트 양식 건축물 또한 지천에 깔려 있다. 코린트 양식의 건축물은 기둥머리를 아칸서스 나뭇잎 모양으로 장식했으므로 소문처럼 매우 화려한 인상을 주었다.

히에라폴리스를 포함해 9박10일에 걸친 이번 터키 답사 동안 들른 유적지와 박물관은 각각 10곳 이상을 헤아린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문화유산 정책과 대비해 여러가지 상념이 사로잡는다.

터키의 극히 작은 단면만을 겪었을 뿐이라는 한계를 인정한다 해도, 무엇보다 터키를 대표하는 양대 국가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이스탄불의 고고학박물관과 앙카라의 아나톨리안 문명박물관을 포함해 이번에 들른 모든 박물관이 기존 건축물을 재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박물관 건물 자체가 문화유산인 셈이다.

하기야 이런 전통은 비단 터키에만 그치지 않는 세계 박물관ㆍ미술관계의 공통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어찌하여 우리만은 이런 흐름에서 탈피해 덮어놓고 신식건물만을, 그것도 규모에만 집착하는지, 아무리 '한국만의 사정'을 인정한다 해도 부끄러운 현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웃 중국만 해도, 대체로 박물관이라면 기존 전통건물을 개조한 경우가 압도적이다. 그것만을 위한 신식건물을 새로 세운다 해도 그 지역 전통건축미를 살리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규모만으로는 세계 6대에 속한다고 자랑하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만 해도 그 건축물 자체에서 한국적인 미를 감상할 수 있는 관람객은 아무도 없다고 장담해도 좋다. 그 모양새는 여의도 63빌딩을 가로로 뉘어 놓았다고 이해해도 대과가 없을 만큼 아무런 특색이 없다.

12번째 지방국립박물관으로 건립을 추진하는 나주박물관도 허허벌판 넓은 대지에 서양 냄새가 물씬 나는 건축물이 될 성 싶다. 폐교가 된 학교 부지 같은 곳을 얼마든지 재활용할 수 있음에도, 이런 박물관 신축안은 박물관 정책 당국자들에게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터키가 대한민국보다 뭐가 모자라서, 톱카프 궁전의 부엌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사용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기는커녕 경복궁을 필두로 하는 서울시내 4대 궁의 전각 대부분은 아예 공개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먼지만 수북이 덮어쓰고 있다.

남대문(숭례문)을 자랑하지만, 정작 그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직접 올라가 본 사람은 문화재 당국자 외에 몇 명이 되지 않는다. 목조건축물은 사람 때를 타야만 생명력이 오래 간다고 말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이참에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 활용방안이 박물관이 되건, 미술관이 되건, 언제까지나 금단의 영역으로 궁궐 전각들의 빗장을 걸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아가 터키 주요 유적지는 우리와는 특성이 다른 데도 원인이 있겠지만, 야외박물관이란 개념이 상당히 활성화한 인상을 준다. 헤에라폴리스 같은 곳은 분명 그 자체가 야외박물관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야외박물관이 도대체 불가능할까? 나아가 그런 후보지조차 없을까?

경주 남산을 생각한다. 말로만 야외불교박물관이라고 하지만, 정작 경주 남산을 그렇게 실감나게 할 만한 어떠한 조직도 우리에게는 없다. 고작 남산을 활용하는 일이라곤 '남산 마라톤대회' 개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유산은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아름답다는 말을 국내 문화유산계 인사들도 입에 달고 다니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국립박물관만 해도 2000년대에 접어들어 문화재보호법 개정을 통해 문화재청을 비롯한 조사기관이 발굴조사 자체 유물을 보관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문화유산의 박물관 '유입'이 급감하게 되자 이런 흐름을 주도한 문화재청을 향한 불만만 쏟아내고 있다.

그런 볼멘 소리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국립박물관으로 대표되는 국내 박물관의 뿌리 깊은 '수장고 중심주의'는 하루 빨리 타파되어야 할 것이다. 박물관 수장고에 들어가야만, 나아가 유물은 박물관에 있어야만 '안전'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은 붕괴되어야 한다.

   
 
1970년대에 발굴한 경주 천마총과 황남대총 유물만 해도 그 출토량은 수만 점을 헤아린다. 이것만으로도 전문박물관을 건립할 수 있는 엄청난 수량이다. 그럼에도 그 많은 유물 중 적어도 90% 이상이 발굴완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공개 상태인 채, 박물관 수장고에 쳐박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난감하기만 하다.

왜 새로운 유물을 우리에게 넘겨 주지 않느냐고 볼멘 소리를 하기 이전에, 수장고에서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 문화유산을 되살리는 일이 더 급선무라는 사실을 터키의 야외박물관에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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