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광주성당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운명 같은 특별한 사연이 있음. 


저는 1980년도에 운동권도 아닌 평범한 학생이었음.

법대를 졸업하고 신문학과 대학원에 다니다가 3월 초에 우연히 법대 후배가 공청회에 초청.

그 공청회에서 한 발언으로 총장을 물러나게 한 주동자로 낙인찍힘.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행방불명자묘역. ⓒ광주인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행방불명자묘역. ⓒ광주인

곧바로 당시 안기부의 관리대상이 됨.

취직도 할 수 없고 아예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됨.

나에게 문을 열어준 곳은 성공회 신학대학원 밖에 없었고 거기서만 저를 받아 줌.

원래는 천주교 신자. 

80년 민주화의 봄을 함께 만끽했던 백남기 선배를 비롯한 긴급조치 복학생들과 5월 17일을 기점으로 헤어져 혼자 광주에 버스로 내려옴.

고속도로에 세워진 바리케이트에 막혀 시내로 들어가진 못하고 대학 후배의 본가인 경주 나환자 재활촌으로 감.

거기서 광주 호남신학교 교수로 봉직하던 후배의 작은 아버지를 통해 긴박한 현장 상황을 전해 들음.

기독병원에서 방금 총을 맞은 희생자에게 수혈해 주고 나갔던 여고생이 죽어서 들어오더라는 소식을 접함.

전국을 한 바퀴 돌며 갑자기 살벌하게 변한 사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낌. 
 
81년도에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급작스레 돌아가셔서 집안이 다 모임.

6.25 때 목포로 피난 와서 살고 계시던 막내 외할아버지에게서 광주참상을 전해 들음.

6.25 때도 보지 못 했던 끔찍한 시신을 보았다고 전해 줌.  
 

1982년도 3월 신학원에 들어감. 

ⓒ5.18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5.18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 누리집 갈무리

신학원 동기 중에 함께 입학한 동기 학생이 연세대학 신과대학 출신. 

그는 알고 보니 80년 5.18 민주항쟁 당시 광주 상무대에 근무했던 군인.

공수부대의 시민군 토끼몰이로 조선대 뒷산에 숨져 있던 그 많은 시신들을 들것에 담아 산 아래로 나르는 임무를 맡았던 것. 

여름방학 때 기독교 청년대표 (EYC 전국부회장)로 예장 대표 유재무 대표와 두 명이 일본에 가서 20여일간 머무름.

일본 JNCC에서 준비한 5.18 민주화운동의 실체를 신문과 비디오 필름 자료로 목격함. 

식민지 시절에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가 해방이 되고, 그리운 고향에 다시 돌아왔던 제주 민중들.

제주 인구의 십 분의 일을 죽이는 끔찍한 제주도 4.3 학살 사건을 겪고 다시 일본으로 간신히 도망쳐 와 살고 있는 재일동포들을 만남.


4.3제주학살과 여순반란에 대해 생생한 체험담을 듣게 됨.

그해 초가을 일본목사들의 답방으로 광주 5.18구묘역에 처음 방문.

비석은 있는데 비문이 없는 공동묘지.

군인들이 다 지우라고 했다고 함.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5.18묘지). ⓒ광주인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5.18묘지). ⓒ광주인

처음에는 시신을 모두 큰 무덤 하나로 합봉하라고 군에서 명령이 떨어진 것을 총구 앞에서 유족들이 거센 저항.

“차라리 우리를 다 죽여라!” 겨우 각자 묻힐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음. 

한 맺힌 수많은 사연이 들어있는 비문은 다 지우게 하거나 아예 뽑아버림.

그나마 몇 개 남은 비문 중에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난리 통에 임신한 몸으로 길가에 나와 늦게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유탄에 맞아 죽은 아내를 기리는 비문. 

우리 모두 다들 서로 끌어안고 울었고 일본 목사들은 한국사람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림.

권력에 미친 악마들에게 무참하게 살해 당한 것도 분하고 억울한데 일본사람들의 동정을 받는 우리들의 처지가 더 비참하고 끔찍했음.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자 나중에 주교가 된 교수신부님이 친구들과 저를 불러 “주교님이 전두환의 조찬기도회에 참석하겠다고 우기고 있으니 이것만은 막아달라. 민중을 학살하고 대통령이 된 사람의 권력 안녕을 위해 기도해 주러 청와대에 가는 것은 전 세계적인 망신거리다.”

그런데 조찬기도회에 가겠다는 그 주교는 한국사람으로서는 첫 번째 한인 주교요, 신자들의 인기와 신망이 가장 높은 사람. 

서울대성당 대학생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청년조직을 움직여 저항. 당시 저는 전국청년 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어 동시다발적인 동원이 가능했던 것. 

그런데 상무대에 근무하면서 5.18의 민중학살을 직접 목격했던 동기 친구는 “그 정도로 싸움을 끝내서는 안된다. 역사의식이 없는 주교를 그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


뻔히 질 줄 알면서 하는 싸움.

국립5.18민주묘지. ⓒ광주인
국립5.18민주묘지. ⓒ광주인

사제가 되는 것도 포기하자며 시작한 투쟁.

결국 서울교구 주교 물러남. 연차적으로 남은 다른 두 한국인 주교도 다 중도 퇴진. 

주로 성명서를 쓰는 임무를 맡은 저는 1학년 마치자말자 퇴학을 당했고, 함께 앞장 섰던 친구 둘은 무기정학을 당했음.

친구들은 한 학기 뒤 저는 1년 뒤 셋 다 복학.

상무대에 근무했던 친구는 5.18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 졸업하자마자 사망. 

사실 친구는 광주 5.18현장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게 아니라 이미 광주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에서 신학원에 들어온 것. 

늘 저에게 “경일아. 제발 부탁이다. 그 무등양말 안 신으면 안 되냐? 조선대에서 본 시신이 자꾸 생각난다.”

조선대 뒷산 공수부대에 쫓겨 죽은 시민들. 가장 인상 깊었던 시신.

까만 새 양복에 하얀 새 와이셔츠. 단정하게 맨 넥타이. 새 구두. 흰 무등양말.

아마 첫 출근을 하러 나섰던 청년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들것에 실은 시신의 구두가 비탈진 길에 미끄러져 자신의 등판을 칠 때 느꼈던 전율.

마치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고 함.

동기 친구를 매일 술을 먹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게 만든 그 끔찍한 5.18 경험.

신학원을 졸업하고 다니던 교회에서조차 쫓겨났던 저는 사제가 먼저 된 친구들의 도움으로 다시 교단에 복귀.

신학원 졸업 10년 만에 1994년 사제서품을 받음. 
 

우여곡절 끝에 2007년 광주성당으로 발령 남. 
 

지난 15일 광주 북구 운정동 옛 5.18묘지(현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제43주년 5.18민중항쟁 추모미사. ⓒ광주인
지난 15일 광주 북구 운정동 옛 5.18묘지(현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제43주년 5.18민중항쟁 추모미사. ⓒ광주인

부임 초.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나중에 뉴라이트로 전향한 김진홍 목사의 설교가 나옴.

버스기사가 기독교 신자였던 모양. 

아들을 잃은 희생자 어머니가 5.18묘역에 묻힌 아들이 땅속에서 추울까 봐 무덤 옆에 구멍을 좁고 깊게 파고 내복을 넣어준다는 얘기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울고 있는데 눈을 떠보니 승객들도 모두 숨죽이며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아! 내가 광주에 와 있구나! 온몸으로 실감하는 순간.” 

신학원 동기 친구가 죽어서 차가운 몸이 되어 관속에 들어갈 때 신학생들 앞에서 약속했음. 

“너의 진실하고 올곧은 삶에 대해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 주겠다”. 

친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너라는 존재가 거꾸로 뒤집힌 이 세상에서 교회와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았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솔직했고 언제든지 불 속에 뛰어들 만큼 역사적 사명에 투철했던 친구. 

35년 만에 자서전 형식으로 친구의 존재와 활약상을 미흡하고 비록 늦었지만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음.

무덤에서 했던 약속을 지킨 것임. 

전라도 지역으로 넘어와서 살게 된 지 어느덧 22년의 세월이 흐름.

고향인 부산에서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정 많고 여리고 예의 바른 전라도.

신학 공부를 마친 아내도 사제가 된 우리 아들까지 20년 만에 광주에 다 모여서 살게 되었고. 광주에 정착한 셈. 
 

광주 사목도 17년째.

ⓒ광주인
지난 15일 43주년 5.18민중항쟁 추모미사. ⓒ광주인

주교가 바뀔 때마다 무릎을 꿇고 간청.

광주에서 계속 사목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역대 주교에게 뭘 요구하지도 사정한 적도 없는 성격.

혹 광주가 아닌 다른 교회로 발령낼까 봐 두려워서.

3년에서 5년이면 무조건 다른 교회로 인사발령을 내는 것이 우리 교단 인사의 거의 철칙처럼 되어 있음. 

한국의 민주화는 광주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깨어있는 도시. 민도가 가장 높은 도시.

임진왜란을 비롯해 동학혁명까지도 민족이 위기에 닥칠 때마다 매번 의병이 일어나 외세의 침략을 막았고 국난에서 벗어나게 했다.

민중의 힘이다. 

일본군이 동학혁명을 진압하며 일본군영에서 전통을 내릴 때 “전라도의 남자들은 노소를 불문하고 다 죽이라.” 일본군들도 알고 있었다.

전라도가 나라를 지킨다는 것을.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

지난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펼쳐진 43주년 5.18민중항쟁 기념 민주평화대행진. ⓒ광주인
지난 17일 광주 금남로에서 펼쳐진 43주년 5.18민중항쟁 기념 민주평화대행진. ⓒ광주인

민중의 피와 살을 버무려 쓴 민주화의 역사. 

대구 인혁당 사건.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전도로 진보적인 도시였는데 대통령 박정희가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내장이 밖으로 나올 정도의 고문을 한 끝에 대법원판결이 나자마자 다음날 8명의 갑작스러운 사형.

국제법학자 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형당한 8명의 친인척과 친구들 지인들을 계속해서 철저히 탄압하고 핍박하자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이고 대구는 보수를 대표하는 도시가 됨.

대구에 비해 광주는 어떠했는가? 

시민을 총칼로 마치 월남전에서 베트콩을 다루듯이 마구 죽이고 그 뒤에도 전두환 노태우 등 군 출신들이 집권하는 동안 계속해서 전라도 출신이면 무조건 전국적 탄압을 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저항은 더욱 불타올라 광주는 한국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아시아 민주화의 성지가 됨. 
 

경남중학교와 서중 일고의 차이. 

ⓒ광주인
ⓒ광주인
ⓒ광주인
ⓒ광주인

제가 다닌 경남중학교는 3년 내내 경남중학 선배 출신 선생님들이 “일본이 좋았다. 일본선생님이 많이 때려줘서 정말 고마웠다.“

자기들끼리 있으면 마치 무슨 특수 계층인 양 일본말로 대화를 나눔.

1967년도에 중학교에 입학했는데도 여전히 일본찬양. 

광주에서는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이 다닌 서중 일고에서 ‘철저하게 민족교육을 시켰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음. 

광주와 부산은 달라도 너무 다른 세상이라는 깨달음. 

5.18민주화운동은 계속되어야 함.

유대인들은 과거 독일인들에게 핍박받고 600만 명이 학살당했던 기억을 시로 소설로 연극으로 영화로 예술적으로 학문적으로 계속 기억을 되살리고 있음.

광주민주화운동도 계속 그렇게 지속이 되어야 함. 정치가들이 약속만 했지 아직 헌법전문에 실리지도 않았음.


■보수 쪽에서 끊임없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려고 시도할 것임. 

김경일 신부(성공회 광주교회 은퇴 사제).
김경일 신부(성공회 광주교회 은퇴 사제).

반드시 헌법전문에 실리도록 지혜와 경륜을 모아 온힘을 다해 노력해야 함. 

저는 제 친구의 영혼이 여전히 광주를 떠나지 못하고 저와 함께 머무르며 호흡하며 살고 있다고 믿고 있음.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오월 어머니들의 고통이 대한민국을 살리고 이 역사를 여기까지 이끌어 왔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요즘 변절하는 친구들이 가끔 나오는데 나이 들면서 뇌의 총량이 많이 줄고 노화 현상 때문이라고 믿고 싶고 저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치매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저 역시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광주 5.18정신을 구현하는데 남은 여생을 바치겠습니다.

이런 강의를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오월 어머니집에 감사드립니다.

2023년 5월 13일.


**너무 길어져서 메모 형식으로 간추린 것을 용서 바랍니다.

**윗 글은 지난 13일 김경일 신부(성공회 광주교회 은퇴 사제)가 오월어머니집에서 초청강연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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