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가 내놓은 자전적인 영화
진실과 허구를 넘어서는 영화

많이 알려져 있듯 <파벨만스>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진실에 기반을 두어 완성된 작품이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영화를 제작해온 거장 감독이 노년에 내놓은 자전적인 영화라는 사실은, 스필버그의 영화들에 매혹되었던 이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이끌만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벨만스>는 스필버그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향수 어린 정서로 애틋하게만 풀어내는 영화가 아니다.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카메라에 포착되는 대상들과 이를 담아내는 연출자 사이의 역학 관계가 빚어내는 긴장이 <파벨만스>를 아찔하고도 매혹적인 영화로 만든다.

<파벨만스>는 1950년대로 부모님을 따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간 새미(가브리엘 라벨)와 그의 부모 버트(폴 다노)와 미치(미셸 윌리엄스)를 비추며 시작한다.

자신을 다독이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극장으로 오게 된 새미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선다는 낯선 경험에 대한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런데 당대의 히트작인 세실 B. 드밀의 <지상 최대의 쇼>(1952)를 보기 위해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던 새미는 자신의 일생을 뒤바꿔놓을, 영원히 잊지 못할 강렬한 순간과 마주한다.

유년기의 새미를 완전히 사로잡은 것은 기차와 차량이 반대 방향에서 서로 다른 힘으로 들이박는 충돌의 스펙터클이다.

생전 처음으로 극장에 가서 <지상 최대의 쇼>를 보고 한껏 매료된 새미가 처음으로 촬영한 영상은 쉽게 말해 모방 그 자체다.

기차가 충돌하는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모사하고, 이와 유사하게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에서 기인한 산물인 셈이다.

성장한 새미는 이와 같은 단순한 모방에서 좀 더 나아가려 한다.

그는 애리조나의 친구들과 함께 서부극을 찍는다.

하지만 그토록 힘겹게 촬영을 했음에도 대미를 장식하는 클라이맥스인 총격씬에서 가장 중요할 총격 효과가 빠진 것을 편집 과정에서 확인한다.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새미는 누가 봐도 가짜 같은 장면에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그런데 TV쇼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연습하던 어머니가 의도치 않게 구둣발로 악보를 찍어 구멍이 난 것에서 불쑥 영감을 얻는다.

새미는 필름에 인위적으로 구멍을 내서 총격 효과를 구현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여기까지는 특정한 하나의 대상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본격적으로 창작에 발을 내딛는, 모방에서 창조로 이어지는 기초 단계에 진입한 전형적인 창작에 입문한 창작자의 과정과도 같다. 

그런데 새미의 삶을 통째로 뒤흔드는 순간이 기다린다.

새미는 자신의 가족과 아버지의 오랜 벗인 베니와 함께 캠핑을 가서 어머니 미치의 모습을 담는다.

그리고 아버지 버트의 간절한 부탁으로 외할머니의 죽음에 큰 슬픔에 빠진 엄마를 위로하는 헌정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촬영한 푸티지들을 돌려보며 충격을 받는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엄마의 이면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푸티지들이 자신이 카메라로 다 아는 대상을 그대로 담는 진실한 결과물로 간주했지만, 그렇지 않음을 자신이 촬영한 푸티지들로부터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이는 카메라를 든 연출자는 대상을 온전히 통제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자신의 믿는 진실의 이미지라고 여길 수 있지만, 자기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들까지도 필름에 담기기도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게 새미는 삶에서의 관계를 자신이 원하는 데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균열로 인하여 상처를 입는다.

가족 내의 문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여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학교 폭력을 당한다. 삶에서의 고통과 회의를 느낌과 동시에 영화를 만드는 것에도 무력감을 느낀다.

그런데 새미에게 이러한 고통은 도리어 원동력이 되어, 그는 결국 허구로서의 영화 혹은 진실로서의 삶이라는 명제를 뒤집고, 뒤섞고, 넘어선다.

영화는 주인공의 성장에 주변의 가족, 친구, 관객 등의 사람들이 끼친 지대한 영향에 방점이 찍힌다.

영화와 삶의 관계에 더욱 깊게 침잠해 들어간다. 

만약 극 중 새미와 관계를 맺은 그러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극 중의 새미 파벨만스는, 그리고 우리가 아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그의 영화는 존재했을까. 

<파벨만스>를 보다보면 절로 드는 생각이다.

<파벨만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영화를 온전히 통제하고, 그만의 비전을 유려하게 관철해내는 연출자로 발돋움해나가는 한 전도유망한 예비 감독의 성공 신화에 집중하는 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60년대에 TV용 영화 <듀얼>을 기점으로 70년대 블록버스터의 시초격으로 불리는 <죠스> 이후 연신 성공 가도를 달려온 스필버그가 밟아온 궤적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아는 거장이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었는지에 관한 일대기로서, 일종의 신화화를 하기에도 좋아 보인다.

하지만 <파벨만스>는 그러한 길로 빠지지 않는다.

여기서 국내에서 <파벨만스>를 소개하는 홍보 문구를 떠올려보자.

영화의 모든 순간과 사랑에 빠진다’.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그런데 원본 문구는 ‘Capture Every Moment’, 즉 번역하자면 ‘모든 순간을 포착한다‘이다.

이 둘의 뉘앙스는 사뭇 다르다.

마치 영화를 향해 순수하고 무한한 애정을 투사하는, 영화에 관한 영화에 어울릴법한 전자의 문구에서는 ’감정‘이 도드라진다.

이에 비해 후자의 뉘앙스는 대상을 포착한다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후자의 캐치프레이즈야말로 <파벨만스>라는 영화를 고스란히 대변해 주는 것일지 모른다.

영화는 카메라로 대상을 담아 이를 편집으로 배치하는 맥락의 예술이기도 하다.

그러한 과정은 창작자와 관람자 모두에게 다른 의미를 창출해낸다.

<파벨만스>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허구와 진실은 얼핏 명확하게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면 많은 이들은 망설임 없이 후자라고 답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은 어떠한가.

카메라가 포착하고 담아내는 이미지는 허구인가, 진실인가.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 파벨만스, 네이버 영화

한편, 우리는 왜 영화에 흠씬 몰입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게 되는 걸까.

카메라에 담기는 대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스필버그의 영화에 매혹되면서 영화에 빠졌던 스필버그 키드였지만. 

그를 향한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파벨만스>라는 작품을 극장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여든을 바라보는 대가가 영화를 만들고 보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완성한다면 어떨지 궁금했다.

그런데 극장 문을 나서며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거듭 겹쳐 재생되고,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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