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처럼 우리네 집단 지성은 불의를 불의로 정의를 정의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3년 만에 또다시 올레길을 걸었다.
쪽빛 바다와 아름다운 오름, 굽이굽이 둥근 포구 뒤로 검푸른 육모꼴의 돌기둥이 우뚝우뚝 솟아있는 4월의 제주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바다의 품에 기댄 흰 포말과, 바윗등에 앉아 노닐다 가는 새들, 구름 따라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절벽 너머 아득히 보이는 종려나무 잎사귀가 한칸한칸 재빨리 올라타고, 수백만 년에 걸쳐 용암과 파도가 빚어낸 위대한 예술품 주상절리가 제주의 봄을 더 눈부시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75년 전, 이 아름다운 땅에 살던 사람들이 겪었던 끔찍한 비극을 망각한 채 마냥 감탄사만 연발하고 걸을 순 없었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을 무표정하게 폐기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나는 4‧3의 비극을 알고 난 다음부터 제주에 올 때마다 과거 '인간사냥'이 벌어지던 참혹한 장면이 눈앞에 아른거려 고통스러울 때가 많았다.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고립된 공간, 어디 마땅히 도망갈 데도 없는 섬에서 토끼몰이하듯 벌이는 토벌대의 공격에 쫒기다 학살자의 총구와 마주했을 때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죽어갔을까?
길을 걷는 내내 불편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긴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그들의 겁에 질린 눈망울에 비친 매 순간도 지금처럼 찬란한 봄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약동하는 생명이 펼치는 삶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죽음의 장면으로 수렴되지 않았을까?
뎅강 떨어진 동백꽃은 무참한 죽임을,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벚꽃은 곧 풍장 될 죽음으로,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목련조차 어느 소설가의 표현처럼 가장 참혹하고 남루한 죽음의 한 모습으로 포착되었을 것이다.


나의 상상이 코끝에 닿는 향기마저 죽음을 애도하는 향불의 향내로 여기며 흠향하며 죽어갔을 것이라는 데에 이르자 그들의 슬픔이 달구어진 인두가 되어 마구 가슴을 지짐질해 대는 것만 같았다.
우리와 똑같은 계절을 맞은 그들이, 눈앞의 찬란한 봄을 그토록 비참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을 마음을 헤아려보니 더 슬프고 가슴이 아리다.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삶은 생의 저 끝에 기다리고 있는 필연적 죽음으로 인해 더욱 찬란한 값을 지닌다는 어느 철학자의 죽음에 대한 기만적 상찬의 수사에 저주를 퍼붓고 싶다.
걷는 내내 쪽빛 바다와 아름다운 오름, 검은 돌담과 노란 유채꽃, 붉은 동백꽃 속에 참혹하게 사라진 수만의 영혼이 아직 잠들지 못하고 슬프게 울부짖는 소리가 귓전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끓어 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쪽빛 바다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무심한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끝이 없었다.
바다 뒤에 바다, 그 뒤에 또 바다.
눈길 닿는 아득한 물마루까지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바다는 은빛 윤슬 속에 산 자와 죽은 자를 함께 보듬고 고요와 역동을 동시에 발산하고 있었다.
안개꽃 하얀 얼굴로 찰그랑거리는 파도가 죽은 영혼이 해원을 바라고 내미는 손길이라면, 현무암의 옆구리를 후비는 파도는 살아있는 자들이 내뿜는 삶의 에너지 같을 성싶었다.


바다는 늘 그렇듯 휘휘 폭풍의 아우성을 짖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아우르고 계절에 앞서 푸르러 간다.
덕분에 아름다운 땅 제주의 속살에 깊이 패인 상처가 이젠 많이 아물었을까?
젖고 젖으며 어떤 폭풍이 불어와도 푸르름으로 일렁이는 바다처럼 우리네 집단 지성은 불의를 불의로 정의를 정의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그래서 아직 불안하다.
우리가 따스한 찻잔에 닿는 한 모금 살가움과 달콤함에 젖어있을 때 언제 말로 무장한 총알이 또 날아올지 모른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아직 과거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세력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4‧3기념일을 다시 맞은 오늘 그날의 비극을 기억하는 기억의 방파제를 더 높이 쌓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망각은 퇴행이란 삿된 것이 가장 올라타기 좋은 높이의 파도 아닌가.
은빛 윤슬이 황금빛으로 물들던 용머리 해안에서 바라본 제주 앞바다의 붉은 석양이 그날의 아픔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