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묘사하는 지역의 특징을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힐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선생 김봉두>(장규성, 2003)의 배경인 강원도 시골마을은 학부모에게 촌지 받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던 불량 교사 봉두(차승원)의 윤리의식과 인간미를 되찾아주고,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2018)의 시골마을은 임용시험에 낙방하고 수험생활과 알바 때문에 제대로 된  밥 한끼 하지 못하는 혜원(김태리)에게 오롯이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차분하고 따뜻한 삼시세끼의 시간을 선사한다.

이처럼 영화에서 지역은 주인공이 도시에서 잃어버린 그 무엇을 되찾아 줌으로써 낙향의 상처를 치유하는 힐링의 공간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인물들이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지역은 현실감을 잃고 낭만적인 색채로 표백된다.

에 찌든 부모에게 학대당하는 어린아이(<선생 김봉두>)의 문제나 혜원이 미뤄둔 취업과 남자친구 같이 골치 아픈 속사정들은 힐링과 함께 휘발된다.

마치 영화의 지역은 모든 아픔을 잊고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에만 온전히 집중해도 괜찮은 장소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영화에서 지역은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지워버린 낭만적 공간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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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창밖은 겨울>(이상진, 2022)은 앞에서 언급한 두 작품들과는 달리 지역을 낭만으로 표백시키지 않으면서도 낭만적인 일상이 벌어지는 공간으로 묘사한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진해는 겨울 바다의 잔물결이 만들어내는 윤슬처럼 잔잔하고 찬란하다.

골목에는 어린 시절의 친구들이 아직도 살고 있을 것만 같은 오래된 가옥들이 곳곳에 즐비하고 거리에는 오래된 가로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카메라는 주인공 석우(곽민규)의 이동을 따라 창원의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아침 일찍 시장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탄 어머니는 겨울 햇살의 따뜻함에 몸을 녹이고 꾸벅꾸벅 졸고 있다.

차가운 겨울 날씨와는 달리 석우의 시선을 통해서 보이는 진해의 풍경들에서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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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로운 진해의 모습처럼 주인공들의 일상 또한 큰 사건이 없이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된다.

석우는 매일매일 같은 버스를 운전해서 똑같은 노선을 경유하고 같은 식당에서 동료들과 조용조용하게 식사를 하는 평범한 버스 기사다.

여주인공 영애 또한 평범하기는 마찬가지다.

버스 티켓을 발권하고 분실물 보관소를 담당하는 영애는 자기주장이 선명해서 석우보다 존재감이 크지만 그녀 또한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다.

이 평범한 두 남녀 사이에 ‘썸씽’이 생기는 것은 터미널에 버려진 MP3를 석우가 발견하면서 부터이다.

MP3를 계기로 두 사람은 마음에 묻어둔 비밀을 하나둘 꺼내놓는다.

영애가 학창시절 탁구 선수였지만 끝내 운동을 포기했다는 고백아닌 고백과 함께 석우가 영화감독의 꿈을 접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속 깊은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사이에는 어느덧 간질간질한 로맨스가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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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창밖은 겨울>에서는 여느 멜로영화에서 볼법한 격정적인 사랑은 없다.

영화는 표층적으로는 두 인물의 로맨스를 그려나가지만 심층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석우와 영애가 안고 있는 미련이다.

영화감독의 꿈을 포기하고 전 연인과 이별에 괴로워하는 석우와 탁구선수의 꿈을 버린 영애는 겉으로는 쿨 해보이지만 마음 한구석에 짐이 있는 듯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영화에서 진해는 도피와 망각의 공간이 아니라 상처를 감내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일상의 장소인 셈이다.

진해는 그들이 살아가는 장소로 존재할 뿐 이들에게 현실을 망각해도 좋은 환상의 공간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물들 자신의 문제는 잊지도 피하지도 한고 똑바로 직시하고 스스로를 다잡고 있다.

<창밖은 겨울>의 진해가 로맨스가 펼쳐지는 낭만적 공간임에도 현실감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주인공들의 상처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공간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꿈을 버린(혹은 잃어버린) 후의 삶과 마주하는 새로운 현실 영화 속의 진해는 남녀의 로맨스의 깊어지는 낭만적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지역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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