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중세 미술은 굉장히 오랫동안 지속된 미술로서 약 1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언제부터 정확히 중세가 시작되는지에 대해서 학자들 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르네상스가 도래하기 직전인 1400년경까지를 일반적으로 중세라 부른다.

물론 동양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의 역사에 중세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느낄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카를 대제, 1512.
15~16세기 독일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판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카를 대제'. 1512. 

왜냐하면, 중세라는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던 이탈리아 사람들의 시각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이탈리아 사람들이 암흑기라 생각했던 것처럼 중세 1000년의 시간 내내 미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죽어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8세기 말부터 9세기에 걸쳐 문학과 시각예술, 건축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우리가 암흑기라 부르는 것은 476년 게르만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Odoacer)에 의해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465년경-511년?)가 강제 폐위됨으로써 시작된 극도의 혼란기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이때 짧은 기간 동안 서로마 제국의 주요 지역을 정리한 프랑크족은 자신들의 왕국, 즉 프랑크 왕국을 세웠다.

이 프랑크 왕국을 처음 통합하여 지배했던 것은 클로비스 1세(Clovis I, 466년경-511)를 시작으로 한 메로빙거 왕조였다.

687년 메로빙거 왕조의 궁재였던 피핀 2세(Pepin II, 635년경-714)는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를 프랑크의 왕자이자 공작으로 불렀다.

‘마르텔(Hammer를 의미)’이란 별명을 가진 그의 아들 카를 마르텔(Karl Martell, 680-741) 역시 아버지처럼 프랑크 왕국의 궁재로서 활약하며 사실상 프랑크 왕국의 실권을 장악했고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다.

카를의 아들인 피핀 3세(Pepin the Short, 714년경-768)는 자신의 형제를 포함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권력을 독점한 후, 교황에게 무능한 힐데리히 3세를 대신해 자신을 국왕으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751년 성상파괴논쟁으로 동로마 황제와 갈등을 겪던 교황 자카리아는 자신을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했기에 이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피핀은 귀족들과 교회에 의해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피핀 이후, 유럽의 황제나 왕을 교황이 승인하는 전통이 생겨난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화려한 시대는 피핀 3세의 아들인 카를(Karl der Große, 747-814)에 의해 시작되었다.

768년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동생과의 경쟁에 들어갔지만, 동생 카를로만(Carloman I, 751-771)이 사망하자 프랑크 왕국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십자가들 든 채 카를은 고대 서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 원정에서 패퇴한 과정의 이야기는 《롤랑의 노래》라는 무훈시로 후대에 전해지게 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로마의 교황은 무력했으며, 동로마 황제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호시탐탐 동로마 황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교황은 자신의 아버지에 이어 교황의 후원자가 되었던 카를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그러던 차에 귀족가문의 출신이 아닌 교황 레오 3세(Leo PP. III, 재위 795-816)의 재위에 불만을 품은 전임 교황의 친척들은 그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게 된다.

799년 5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교황의 눈과 혀를 뽑으려던 괴한들은 카를의 사절과 군인들에 의해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자신의 진영으로 피신한 교황의 신변을 보호한 카를은 적극적으로 그의 보호자가 되었다.

서기 800년 12월 25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로마의 교황 레오 3세는 성탄절 미사를 집전하는 도중 무릎을 꿇은 카를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줌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언하였다.

정통 로마 황제의 피가 한 방울도 없는 카를이지만 전능한 신의 이름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 순간에 동로마 제국과 동격이 된 카를은 수많은 고대의 경전들을 복원하고 지식인들을 초빙하였다.

또한 곳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성경, 음악, 역사, 시, 건축 등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오늘날 유럽 대학의 전신을 만들었다.

카를에 의해 시작된 이러한 업적은 중세 최초의 카롤링거의 르네상스로 불렸으며, 카를은 유럽의 아버지로서 카를 대제(Karl der Große), 샤를마뉴(Charlemagne), 카롤루스 마그누스(Carolus magnus) 등으로 불리게 된다.


**윗 글은 월간 <광주아트가이드> 156호(2022년 11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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