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는 양자경, 키 호이 콴, 스테파니 수 주연의 영화로 SF, 액션, 코미디 장르를 통해 미국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한번 사는 인생에 이룬 것 하나 없다며 모든 것을 정산해버리고 싶은 마지막 순간, 역설적으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때는 새해를 앞둔 한해의 마지막, 에블린(양자경)은 자신이 운영하는 코인 세탁소의 세무조사를 앞두고 있는 인물이다.

세탁소 운영을 위한 지출 영수증을 살펴보는 것은 곧 중년의 여성 에블린의 삶 전체를 톺아보는 일과 중첩한다.

때문에 지출 내역에 대해 추궁하는 국세청 직원의 쌀쌀한 태도는 한낱 영수증뿐만 아니라 그녀의 인생 전체를 부정하는 것만 같다.

꿈 대신 결혼을 택한 뒤, 남편을 따라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았던 지난하고도 남은 것 없는 삶. 회고할 수는 있지만 회귀할 수는 없다며 낙담하던 그때, 영화는 평행우주의 무한성을 통해 또 다른 삶의 기회를 부여한다.

ⓒ더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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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적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가수가 될 수도 있고 영화배우가 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도 있으며, ‘라따뚜이’와 경쟁하는 요리사로까지 존재 가능하다. 어디 그뿐인가.

또 다른 ‘나’의 다양한 기술들을 흡수하여 무협영화 저리가라할 무공실력까지 갖출 수 있다.

이렇게 갑자기(All at once), 광활한 우주에 편재하여 살고 있는 다종다양한 에블린들은 지금 여기, 지구에 사는 에블린을 중심으로 결속하기 시작한다.

마치 분출되지 못한 욕망 속에 잠식된 에블린이 어느 날 꾸는 꿈의 형상과 같다. 현실일까, 꿈일까 에블린이 느끼는 혼란스러움만큼 지켜보는 관객 또한 혼란 속에서 이야기의 첫머리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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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혼란스러움은 곧 이루 말할 수 없는 흥미진진함으로 뒤바뀐다. 전형적인 가족드라마 서사에 SF 장르를 결합한 이 영화가 보여주는 상상력의 층위는 가히 놀랍다.

다른 ‘멀티버스’로의 ‘점핑버스’(각각의 세계를 오가는 이동술)를 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이 선사하는 코미디는 이 영화의 매력을 한층 더 높인다.

이를테면 이 세상은 통계적인 필연성으로 그득하기 때문에 오히려 개연성이 없는 행동을 해야 ‘점핑버스’에 성공할 수 있다는 설정이 그러하다.

느닷없이 입술보호제를 먹거나,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악당에게 되레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 숱한 고통의 관문들은 웃기다 못해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 어떤 영화에서도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감각이다.

버스점핑을 시도하는 그 순간마저 관객에게는 이미 새로운 차원의 문턱을 넘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타 멀티버스 소재의 영화들과 차이점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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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 없는 엉뚱한 상상력의 향연 속에서 필연적인 것이라곤 악당 조부 투파키의 정체가 에블린의 딸 조이(스테파니 수)라는 사실이다. 조부 투파키는 베이글 구멍을 블랙홀처럼 만들어 우주의 모든 것을 흡수, 소멸시키려는 허무주의자 악당이다.

이런 그녀는 놀랍게도 다른 행성의 또 다른 에블린에 의해 탄생했다.

그리고 결자해지를 해야 할 당사자는 이미 죽고 없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각 세계의 에블린들은 조부 투파키의 폭주를 막아낼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중에서도 지금 여기, 지구에 살고 있는 에블린은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진 에블린이 된다. 이룬 것이 없으니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 가능성은 그녀를 조부 투파키의 맞수의 위치에 놓는다.

애초에 Nothing이라서 Everything이 될 수 있고, 그릇이 비어 있으니 새롭게 채울 물의 양도 많아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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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부 투파키의 생각은 다르다. 실패한 인생을 산 에블린만큼 자신이 느끼는 ‘삶의 덧없음’을 이해할 사람이 없다고 확신한다.

이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행성에서 두 사람이 돌의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통해 잘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서 스스로조차도 무(無)가 됐을 때 느낄 수 있는 평온함이란, 지금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결과로 치닫게 한다.

그렇게 에블린은 베이글 구멍으로 상징되는 파멸의 통로 앞에서 고민하기에 이른다.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긍정하며 계속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부정하고 파멸시킬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이다.

이 같은 고민은 현실 속 관객의 것으로 어느새 전이되고 그렇게 사유는 점점 확장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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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긍정하기도 한다.

이민자로서의 고충, 인종차별, 세대 간의 갈등 등 여러 사회문제를 곳곳에 포진시키며 특수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 대한 공감을 유도한다.

동시에 전 지구적 관점에서 자본주의, 관료주의가 팽배한 사회 속에 사람들이 점차 무감각해지는 행태를 은유적으로 고발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꺼내 놓은 해결책은 바로 ‘다정함’과 ‘상상력’이다.

차가운 자본의 시대에 ‘다정함’이 깃든다면 우리의 삶은 그다지 삭막하지도 않을 것이고, 엄격한 관료의 세계에 ‘상상력’이 더해진다면 진심어린 공감과 위로가 썩 어렵지 않은 사회로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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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본디 인간이란 생각만큼 실망스러운 존재가 아니며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고, 다정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음을 일깨운다.

영화는 우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낙담하지 말라, 지금까지의 인생도 충분히 멋지다며 위로한다.

얼마 전 전국민의 마음을 쓰라리게 만든 참사가 일어났기에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더 굵직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허무함과 부채감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망각할 수도 있을 시기다.
 

그러나 잊지 말자.

‘다정함’과 ‘상상력’만 잃지 않는다면, 잠자던 우리의 감각은 반드시 깨어난다는 것을.

“상식이 통하는 한줌의 시간을 위해 살아간다”는 이 영화의 대사가 깊게 와닿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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