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마을의 생명을 기록한 작가

제주여행에서 만난 전시와 작가다. 전시를 보면서 습기 가득한 제주의 여름 날씨를 용서했다.

어버린 마을 때문일까, 전시장 내부를 가득 메운 건 서늘함이었다.

펜화로 그린 그림책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에 게재된 원화전시였다.

벽면을 따라 그림을 읽다 보니 어느새 사라진 마을이 한 권의 그림책으로 완성되어 다가왔다.

전시장 입구에는 이 그림들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지를 글을 통해 정중하게 알린다.

원화는 과거부터 현재를 그림으로 기억을 소환했다.

김영화 작가.
김영화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1948년 11월,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에 총성이 울렸다.

온 마을이 불태워졌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무등이왓은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73년이 흐른 2021년 6월, 이곳에 사람들이 찾아와 밭을 일구고 작고 노란 좁씨를 뿌렸다.

무등이왓은 파릇한 새싹을 틔우고 땡볕과 태풍과 씨름하며 노란 알곡을 키워냈다.

잃어버린 마을_ 무등이왓
 

잃어버린 마을이 그림으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라진 마을이 아니다.

지속성의 의지를 거부당한, 어떤 세력에 의해 잃어버린 마을에 대한 기록이 무등이왓이란 마을 이름을 되새김하게 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자연은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에 생명을 살게 했다. 서러운 영혼들이 모여 각자 꽃을 피운 것만 같았다.

작가는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제주민예총, 탐라미술인협회 주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된 농사였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에서 4·3을 기억하고자 하는 예술인과 마을 주민들이 조 농사를 지었다. 계절을 지내고 늦가을이 되어 수확한 뒤 제주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빚었다. 술이 만들어진 후 4·3 영령들을 위무하며 술을 진설했는데,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그림을 그린 것은 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자 하는 생각이었던 같다.”며 과정을 설명했다.

1948년 11월, 약 130여 가구가 빼곡하게 들어선 작은 마을인 동광리의 무등이왓 마을은 잔인한 학살이 자행되면서 마을이 모두 불타버렸고 100여 명의 4·3 희생자가 발생했다.

‘잃어버린 마을에서 보내는 선물’ 프로젝트는 억울하게 죽어갔던 156명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곳곳에서 일어났던 4·3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4·3 생존자와 마을거주민과 함께 4·3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낸 결과물이다.

마을의 지형이 춤을 추는 어린이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인 ‘무등이왓’은 현재, 무등이왓 마을의 옛터로 기억 속에 남아있으며 4·3의 유적지로 존재할 뿐, 넓은 땅, 어디에도 사람은 살지 않는다.

작가는 농사에 참여하는 틈틈이 작은 드로잉북을 펼치고 무등이왓을 통과한 현대사의 비극인 4·3을 기록했다.

번거로운 재료보다 때와 장소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는 펜을 사용해 무등이왓에서 농사 중에 맞닥트리는 결정적인 순간들을 기록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책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이야기꽃, 2022)을 출간했다.
 

바람은 희망 씨앗을 물고
 

여름이 시작되는 유월, 노란 조 씨앗을 뿌리고 싹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뙤약볕에서 김을 매고, 그사이 태풍이 불고 추수한 후 술을 빚는 과정이 눈물겹다.

작가의 찬찬한 눈길 속에 마을의 통곡과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어간 156명의 한과 그들에 대한 위무가 그림 안에 담겼다.

술을 빚어 무등이왓에 진설할 때는 156개의 수저를 맹개낭 가지와 청새 꽃을 하얀 쌀밥 위에 꽂았다.

맹개낭은 망개 넌출로 불을 피워도 연기가 나지 않아 피신한 사람들이 밥을 지을 때 유용하게 사용했으며, 청새 꽃은 죽은 이들의 영혼을 불러모을 푸른 대나무 이파리를 말한다.

폭풍에 스러진 조 이삭을 일으켜 세우고, 그 조가 익어서 이삭마다 누렇게 알곡으로 자라는 것을 보면서 작가는 이 모든 것을 눈물겹게 바라보며 펜으로 기록하며 그림으로 완성했다.

마을의 입구에 굳건히 서 있는 늙은 팽나무에 앉은 까마귀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고 작가는 그것마저도 아낌없이 그림 안에 기록했다.

참혹한 기념비 하나 없이 잃어버린 무등이왓 마을은 이렇게 다시 작가의 펜으로 되살아났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바람이 무등이왓을 통과하고 있다.

김영화- 그 나무 그늘아래, 150×130cm, 종이위에 펜, 2022. ⓒ광주아트가이드
김영화- 그 나무 그늘아래, 150×130cm, 종이위에 펜, 2022. ⓒ광주아트가이드

**윗 글은 월간 <광주아트가이드> 154호(2022년 9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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