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거장의 영화를 탐구하다.

영화 <기생충>으로 2019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꼭 봐야 할 영화 <베스트 10> 안에 들어 있는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復讐するのは我にあり)>.

한국에는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子, 1999 한국 개봉), 간장 선생(2001 한국개봉)으로 더 알려진 이마무라 감독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은 1979년에 제작된 영화로, 그의 전작인 <신들의 깊은 욕망(神々の深き欲望)>에 이어 11년 만에 나온 작품으로 이마무라 감독의 12번째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쇼와(昭和) 39년(1964년)으로 1963년 10월부터 1964년 1월에 걸쳐 두 명을 살해 도주, 도주 중 또 3명을 살해한 니시구치 아키라 사건을 모티브로 한 사키 류조의 소설 『복수는 나의 것』(1976)이라는 소설이 원작이다.

영화는 살인범인 ‘에노키즈’가 체포된 순간인 1964년 1월 4일을 기점으로 과거로의 플래시백 안에 도피 중의 8일간의 행적과 그의 어린 시절이 교차편집 되다가 영화의 후반부에 다시 현재 시점으로 귀환한다.

영화는 주인공 에노키즈가 형사들에게 연행 돼가는 차 안에서부터 시작한다.

형사들을 대하는 그의 행동은 너무나 무례하고 당당하다. 5명의 사람을 죽인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는 형사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하고 형사의 질의에 반문하는 등, 죄책감 따위는 전혀 없는, 냉혈한이다.

살인 후 자신의 손에 묻은 혈흔을 자신의 소변으로 씻어내는 씬은 에노키즈의 극악무도함을 가시화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에노키즈의 잔혹함을 가시화함과 동시에 살인에 대한 변명의 기회마저 박탈시키며 마지막까지 그를 동정할 빌미를 전혀 주지 않는다.

영화는 가부장제와 일본의 전후 사회의 비판을 살인과 욕정으로 형상화한다.
 

■일본 전후 세대의 무기력, 떨칠 수 없는 일본 제국주의의 유령
 

영화에서 범죄영화를 다루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인지는 몰라도 세미다큐멘터리(기록적인 것에 극적인 요소를 섞어 작품의 효과를 높이는 수법)적인 요소를 활용한다.

예를 들어 남자의 내레이션, 사건시의 년도 표기 등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쇼와 ○년’이라는 자막은 크게 30년대 후반, 40년대 중반, 그리고 60년대를 가시화한다.

이는 전시(戰時), 패전 직후, 전후(戰後)라는 쇼와 13년(1938), 쇼와 21년(1946) 쇼와 39년(1964)을, 특히 1964년은 영화 속에서 에노키즈가 붙잡힌 해이다.

그 해는 일본의 첫 올림픽인 1964년 도쿄올림픽이 개최된 해이기도 하다.

일본은 패전 이후 한국 전쟁의 특수를 기반으로 경제의 부를 축적해 간다. 그리고 그 정점을 찍은 해가 바로 쇼와 39년(1964)이다.

일본 도쿄올림픽은 일본이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입지를 굳히는데 하나의 신호탄의 계기로서 1964년 ‘도쿄올림픽’은 일본에 있어서 큰 상징성을 내포한다.

쇼와 13년(1938)은 37년에 중일전쟁의 발발로 인해 일본이 중국에 승리함으로써 대동아전쟁으로 가는 초석이 된 해로 이때 국민 총동원법이 공표되면서 전시 체제로 전환이 되기 시작한다.

고토(일본에서 가톨릭의 박해가 심했던 곳) 출신의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배를 강탈당하는 모습은 이를 잘 대변해 준다.

“아버지가 졌다”라는 대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가장 이 영화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도 일본 제국주의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

또 하나는 일본의 패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면 무릎 꿇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 이후 악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에노키즈의 행동은 패자의 무력함과 나약함, 그리고 이를 방관하고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가 전시 동안 소년원에 있었다는 점)

쇼와 21년(1946)은 일본이 패전 이후 GHQ의 통치하의 점령기 시기로 패전 직후인 1946년은 일본의 미국 문화 유입과 패전에 의한 정신적인 패닉 상태에 일본국민들이 노출된 시기이다.

이때 미군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다니면서 일본 여자들을 유린하는 장면에서 여러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노키즈는 전시, 점령기, 전후를 모두 경험한 전후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경험하지 못한 전후 세대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는 전시체제하에서 일본의 전쟁동원에 결국 패하게 되지만 에노키즈는 이를 방관하는 방관자 입장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패하지도 승리하지도 못한 인물인 것이다.

그가 행한 살인들과 그리고 여자들을 자신의 욕정의 대상으로만 취급했던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무의식적인 살인과 무미건조한 섹스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에노키즈가 일본의 전후 세대의 대표적인 인물을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패전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일본 제국주의를 거부했듯이 자신도 이를 거부하면서도 이 안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함 또한 보여준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자신도 왜 살인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하마마츠 살인사건이다.

하마마츠 살인사건은 처음으로 에노키즈가 여자를 살해한 사건이며 그동안 만나왔던 여자 중 자신이 살인범임을 알면서도 자신을 감싸주고 사랑해준, 그리고 자신의 아이까지 잉태하고 싶어 했던 하루를 죽인 사건이며 그의 마지막 살해사건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살인범이었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살인에 대한 동기와 이유를 자문할 수 있도록 짧지만 굵직한 대화를 나눴던 하루의 어머니 또한 살해한다.

이 살인이 우발적으로 일어났지만 하루가 일본인이 아닌 재일조선인일지도 모른다는 정황상 암시를 보여주는 장면이었기에 다른 살인사건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하루가 극 중에서 정확히 재일조선인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매년 츠케모노(절인야채)를 담궈 먹는다며 붉은색의 양념에 배추를 버무리는 하루의 모습에서 붉은 양념을 잘 사용하지 않는 일본인과 비교하면 묘한 의아함을 느끼게 한다.

이어 에노키즈가 하루를 목 조르면서 새어 나온 한마디 “고마워”라는 말은 죄의식을 처음으로 죄의식을 느끼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면을 종합해보면 영화는 살인마 에노키즈를 통해 단순한 당시 일본 사회의 병폐가 아닌 전쟁의 상흔에서 온 병폐를 의도적으로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 스틸 컷
ⓒ복수는 나의 것 스틸 컷

■가부장제의 유령

영화는 1, 2, 3부로 나눌 수 있는데 초반부에는 잔혹한 살인을 하는 에노키즈에겐 살인의 동기도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의 중반부로 가면 그의 이유 없는 살인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향해있음을 알 수 있다.

어릴 적 카톨릭 신자였던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배까지 강탈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참지 못했던 에노키즈.

아버지는 겁쟁이이며 아버지가 일본군에게 무릎 꿇는 모습을 보고 패배했다고 생각하는 에노키즈는 그날 이후로 의지하고 믿었던 아버지를 부정(否定)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악행의 서막이 시작된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에노키즈의 모습은 마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연상시키지만, 이마무라 감독이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굳이 영화에 삽입했으리라곤 보지 않는다. 아버지와는 적대 관계이지만 어머니와는 사이가 남다른 에노키즈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했지만 에노키즈는 그의 아버지를 죽이지는 못한다.

“네 피는 내 피이기도 해, 내 피속에는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지”라는 아버지의 대사에서 에노키즈가 아버지이고 그 아버지가 에노키즈라는, 두 사람의 동일시는 두 사람의 ‘날 것’의 욕망은 같은 하나였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에노키즈 역시 아버지를 죽일 엄두는 내지 못한다.

그는 나약하다. 아버지의 나약함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그 모습이 아버지를 증오하게 된 원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 역시도 그 나약함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이다. 에노키즈는 영화 속에 여성들을 살해하고 남성들에겐 금품을 갈취, 살인을 저지르지만 결코 아버지에겐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영화는 중반부에 접어들면서 이 영화는 에노키즈 혼자만의 서사가 아닌 아버지에 대한 서사 역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신을 믿기에 며느리의 유혹도 뿌리치고 에노키즈가 악(惡)이라면 이와 상반되게 아버지는 선(善)으로 비춰졌지만 마지막씬에서 결코 그렇지만은 않음을 시사한다.

또한, 에노키즈의 살인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은 하루의 어머니의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을 아직 죽이지 못해서” 계속해서 범행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 건지 반문하는 장면에서 에노키즈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에노키즈의 살인 동기는 명백하진 않다.
 

ⓒ복수는 나의 것, 스틸 컷
ⓒ복수는 나의 것, 스틸 컷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는 난해하다.

그의 영화는 인간의 욕망과 일본의 모순된 구조주의를 함께 내포한다.

<복수는 나의 것> 또한 이러한 연결 선상에 놓여있는 영화 중 하나다. 

이마무라의 영화에서 여성이란 구원자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은 성녀적인 모습이 아닌 저급한 모습으로 표현되기에 구원자라는 느낌이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은 남성의 성적 도구로만 보여지지만 그것은 보여지는 것일 뿐 에노키즈가 유일하게 여성의 품안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여성 중에서 하루를 살해한 것은 어쩌면 그가 마지막까지 벗어나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굴레, 즉 일본 제국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내포하는 것은 아닌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의 뼈가 땅에 떨어지지 못하고 공중에 멈춰 있었던 것은 아마도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전후 세대로써 아버지 세대의 유령을 떨쳐내지 못한 분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아직도 복수가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섬뜩한 엔딩씬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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