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과 박은옥이 건네는 이야기와 위로

정태춘, 흔히들 그의 음악적 삶은 1980년대 후반을 기준으로 둘로 나뉜다고 한다.

앨범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 서정적인 포크가수의 시기와 87년 민주항쟁 이후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노래와 함께 실천한 운동가의 시기.

그러나 그의 음악과 삶은 둘로 나눌 수 있는 별개의 시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음악을 통해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2006년 한미 FTA 스크린쿼터 운동 때 처음 정태춘을 만나 16년 동안 그를 지켜본 고영재 감독이 그의 여정을 28곡 노래로 풀어낸 작품이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메인 포스터ⓒ다음영화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메인 포스터ⓒ다음영화

그는 틈틈이 일기를 썼고, 일기 쓰듯 노래를 만들었다.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우연히 양병집과 서유석을 만나 음반을 냈으며, 운 좋게 <촛불>이라는 노래가 히트하면서 인기가수가 됐다.

1집의 성공 덕분에 2·3집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제작할 수 있었던 정태춘은 3집의 절반을 국악으로 채운다.

그는 서양화되는 대중음악의 경향 속에서 자신의 작업이 의미 있는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 2집과 3집은 모두 대중의 외면을 받았고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게으르면 망한다’를 써서 벽에 붙이고 아내 박은옥과 딸 정새난슬을 위해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유명한 곡 대신 자신의 노래만 불렀던 그에게는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정태춘과 박은옥은 4년간 전속에 800만원이라는 조건으로 지구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정태춘 박은옥의 얘기노래마당’이라는 이름으로 3년 동안 전국 소극장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연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음영화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음영화

이 공연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면서 그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심의에 걸려 발표할 수 없었던 노래를 부르면서 정태춘의 노래는 ‘나의 이야기’에서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1988년, 청계피복노조의 일일 찻집에 초대된 것을 계기로 노동운동가들을 만나고 노동자들 모임에 초대되어 나간다.

또한 정부의 탄압으로 조직이 무너지고 재정난을 겪는 전교조를 위해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 전국순회공연을 하면서 이 땅의 현실을 반영하고 비판할 새로운 노래들을 써 내려간다.

그렇게 “‘사색의 시인’은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은 ‘의식 있는 투사’가 되었다.(신현준·최지선, 『한국 팝의 고고학 1980』)“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질 않나

거짓 민주자유의 구호가 넘쳐 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아래 마른 무릎을 꺾고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 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 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가사)

 

하지만 그 노래들은 사전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고 거의 모든 곡들이 반려되었다.

당시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이뤄졌던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는 어떤 노래가 심의에 통과하지 못하면 금지곡이 되어 발표할 수 없게 했다.

심의 과정에서 반려된 곡들은 가사를 수정하는 개작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러한 사전심의는 작품이 창작되는 단계에서부터 이미 자기 검열의 기제로 작동하며 자유로운 창작과 표현을 가로막았다.

“심의를 제출하고, 당국의 그분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수정 지시가 내려오고, 수정해서 다시 제출하고, 또 마음에 안 들면 반려하고, 어떤 때는 심의 회의에 내가 직접 출석해서 소명을 하고, 여러 명의 심의위원들은 긴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장황한 설교와 추궁 끝에 재수정 지시를 내리고, 난 자포자기하고, (…) 그 후부터는 창작을 시작하기도 전에 심의를 생각해야 하고…(정태춘,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결국 음반을 불법으로 출반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그렇게 사전심의 철폐를 위한 싸움이 시작된다. 그는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비합법 음반을 발매하는 위법을 저질렀다고 기자회견을 열고, 각 방송사에 음반을 돌렸다.

심지어 몇몇 방송사는 이 음반의 노래를 방송에 내보내기도 했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음영화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음영화

그는 불구속기소되었고, 사전심의 조항이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을 했다.

그리고 1996년, 헌법재판소는 사전심의 조항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60여 년간 지속된 음반 사전심의는 드디어 사라지고 검열 기구였던 공연윤리위원회도 해체된다.

이제 누구나 다른 이의 검열 없이 앨범을 발표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 정태춘의 불법음반 2장은 ‘합법적으로’ 재발매된다.

정태춘은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언제나 기타를 메고 함께 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 첫해의 대상으로 쿠바 작가의 <잊기 위하여>라는 작품이 선정되었다.

진보 미술계는 “안티 비엔날레”를 기획하고 정태춘에게 공연 참여를 요청한다.

그는 <잊지 않기 위하여>라는 곡을 만들어 5·18 구묘역에서 노래했다.(노래의 제목은 나중에 <5·18>이 된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와 함께 변해가는 음반시장 속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사라져가고 그는 자기 속으로 침잠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뒤로 물러서 있던 그를 고향이 불러냈다.

그의 고향에서 사람들이 쫓겨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투쟁의 들판에서 싸웠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음영화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음영화

그러나 그 들판은 평택 미군기지로 뭉개지고 그의 투쟁도 그렇게 막을 내렸다.

검열 철폐 싸움을 함께 했던 이들이 대통령이고 법무부장관이었던 그 때, 그는 그렇게 노래를 멈췄다.

노래 절필을 선언한 그를 다시 노래로 불러들인 이는 박은옥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앨범쯤은 아내를 위해서 만들어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그녀의 호소로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가 세상에 나오면서 그의 노래는 다시 이어지게 된다.

정태춘은 <아치의 노래> 가사에서 자신의 노래가 “새장 주위로만 그저 뱅뱅 돌고” 있다고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그의 노래는 과거라는 새장을 넘어 지금까지 여전한 울림을 주고 있다.

그의 오랜 팬은 또 다른 봄을 고대하며 그의 노래를 듣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들은 10대 청소년은 그의 노래를 오랫동안 사유하고 싶어하고, 우연히 <5·18>을 듣게 된 아티스틱 스위밍 선수는 그의 노래를 또 다른 작품으로 변주한다.

이렇게 정태춘의 노래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의 노래가 사람들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노래는 언제나 사람들을 향해 건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정태춘의 음악여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40년 넘게 그의 음악적 동지로 곁을 지킨 박은옥일 것이다.

딸 정새난슬은 말한다.

“왜 엄마는 ‘정태춘 박은옥’의 호명 순서에 반박하지 않은 것일까. 아빠보다 기타를 잘 친다고 종종 자랑하는 가수 박은옥은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재능이 아깝지도 않고 남편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이 억울한 적이 없었을까.(정새난슬, 『러키 서른 쎄븐』)”

이 영화의 제목조차 ‘아치의 노래, 정태춘’. 박은옥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기꺼이 정태춘의 그늘에 가려지길 택한 박은옥이라는 이름 없이 지금의 정태춘이 있을 수 있었을까.

정태춘의 노래가 누군가에게 띄우는 편지였다면, 박은옥의 노래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위로였다.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음영화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다음영화

“정태춘씨가 늘 그럽니다.

그게 당신이 슬퍼한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뭔가를 위해서 싸우지 않고, 달라지기 위해서 스스로 나서서 하지 않으면.

그 말도 참 맞습니다. 근데 저는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 공감해주는 게 첫 번째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 능력만큼 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공연장에도 아마 틀림없이 그 힘든 시기를 넘어가는 분이 계실 거라고.

그분을 위해서, 또한 위로가 필요한 저를 위해서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를 불러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들의 노래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위로가 되길 바랐으나 오히려 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며 감사를 전한다.

비장하게 ‘아침 이슬’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결의를 다지는 대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서로 용기를 북돋는 지금, 그녀의 위로 역시 따스하게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를. 

나아가 정태춘이 꿈꾸는 세상인 ‘과거사회’, 부를 축적하지 않았던 그런 사회가 실현되어 우리에게 더 이상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날이 오기를 고대해본다.

 

어머니,

저는

어느 잔잔한 물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조그만 집을 짓고

선량한 이웃들과 아주 순진하게 살고 싶은데요

작은,

아주 작은 사회에서

아주 낮은 생산성으로

겨우 연명할 만큼만 농사를 지으며,

게으르게 낚시하며

그렇게 살고 싶은데요

(정태춘, 『노독일처』, 「어머니」)

*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현재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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