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종>은 무시무시한 영화이다.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잔혹한 장면과 소름이 돋을 만큼 충격적인 반전을 주는 시나리오의 짜임새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영화를 지배하는 시선 때문이다.

페이크 다큐로 시작해 파운드 풋티지로 끝을 맺는 영화의 시선은 다큐멘터리적이라기 보다는 관음증을 자극하는 아마추어 포르노에 가깝다.

<랑종>을 지배하는 그 시선은 모종의 호기심과 불안감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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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의 시선을 경유해서 사건의 속속들이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호기심을 충족시키지만, 동시에 여성의 신체를 집요하고 은밀하게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주인공 밍(나릴야 군몽콘켓)의 신체를 집요하게 탐닉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일방적으로 좆아 다니다, 밍의 꺼림칙한 시선을 마주치게 된다.

이러한 시선의 뒤엉킴은 카메라의 주체와 촬영 대상이 내뿜는 ‘본다는 것’의 무지막지한 폭력성을 상징한다.  

<랑종>에서 시선의 권력은 촬영팀의 손에 쥐어져 있다.

악령에 사로잡혀 자극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소녀 밍은 시각적 욕망을 자극하는 호기심의 대상이다.

카메라는 이러한 밍의 신체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처음 만난 남자들과 직장에서 성행위를 일삼고 심지어는 키우던 강아지를 산채로 잡아먹는 밍은 시각적 쾌락을 해소하기에 충분한 유희의 대상이다.

뷰 파인더 안에 잡히는 피사체가 피 흘리는 소녀이건 악귀이건 카메라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나아가 밍의 잔인한 행동 덕분에 카메라는 소녀의 고통을 방관했다는 윤리적 책임에서 해방되고, 그녀를 향한 관음증적 시선은 ‘목격’으로 정당화 된다. 

하지만 이제부터 카메라가 그녀를 쫓아다니기도 쉽지 않아진다.

카메라의 사정거리를 넘어 숨어버리고 도리어 촬영팀을 훔쳐보는 그녀는 이제 피사체가 아니게 되었다.

카메라를 경유할 수밖에 없는 관객은 이때부터 언제 밍이 등장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카메라 앞에서 끔찍한 기행을 보여주던 밍은 훌륭한 볼거리이기도 하지만 악령에게 시선의 권력을 빼앗긴다는 불안을 자극한다.

촬영팀을 공격하는 밍의 행동은 이러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랑종>에서 벌어지는 이 시선을 빼앗고 빼앗기지 않기 위한 권력 싸움은 피로 점철된 이전투구(泥田鬪狗) 그 자체다. 

시선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는 자는 밍이다.

밍은 자신을 찍던 촬영팀에게 복수라도 하는 듯 카메라를 빼앗아 처참하게 죽어가는 그의 모습을 촬영한다.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밍의 시점에서 숏이 진행되면서 시선의 권력의 누구의 손에 쥐어져 있었는지가 드러난다.

관객이다. 카메라를 경유해서 밍의 신체를 훔쳐본 것도 관객이며, 밍이 촬영한 카메라맨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도 관객이다.

권력의 이전투구 속에서 이를 모두 관조하고 있었던 건 관객들이다.

잔인한 장면도 관조할 수 있다는 것은 영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도시인의 일상이겠지만, 그저 모든 일은 감상에 그치고 ‘목격자’로서의 윤리적 역할이 사라지고 있다.

외지에서 온 도시인인 카메라맨이 바로 그런 관객들의 관음증 섞인 시선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관객의 대리자는 처절하게 응징당하며 끝이 났으니, 그 책임은 관객이 이양 받는다.

영화가 종료되고 암전된 스크린은 계속 관음하고 감상할 것인지, 혹은 목격자가 될 것인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목격자는 본 것을 고발하고 행동하지만, 감상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만족하고 나간다.

어느 길을 선택할지는 영화관을 나선 관객들의 몫이다.

관객은 관음자의 시선은 죽음을 맞이했지만, 선택하기 어려운 기로에 놓인다.

<랑종>이 무시무시한 것은 선택에 따라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결정을 종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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