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개봉(한국에서는 2021년 개봉)한 영화 <스파이의 아내>는 일본의 대표 감독 중 한 명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첫 시대극 영화로 202077회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 2020년 일본의키네마준보최고의 일본영화 1위로 선정됐으며 2021아시아 필름 어워즈에서 작품상을 수상했다.

​'스파이의 아내' 스틸 컷​
​'스파이의 아내' 스틸 컷​

이 작품은 기존의 구로사와 영화와 비교했을 때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지금껏 구로사와 감독이 추구했던 현대물이 아닌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전작인 <큐어>, <회로>, <도플갱어> 등에서 인간의 내면을 파헤쳐 그 안에서 끔찍한 그 무엇인가를 발견해내는 심리적 공포 스릴러, 또는 호러 영화를 만들어 왔던 그가, 이번에는 서스펜스 멜로드라마라는 장르 영화를 연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그의 새 영화 <스파이의 아내> 역시 쉽게 손이 닿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2020년 작품인 <스파이의 아내>에 대해 말하려 하는가.

이유는 올해94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한 <드라이브 마이카>의 감독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각본을 쓴 작품이기 때문이다. (노하라 다다시(영화 <해피 아워> 공동각본가) 그리고 구로사와 감독, 세 명의 공동 각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매료돼 작년 말 광주극장에서 열린 특집전 <하마구치 류스케 스페셜>을 전부 다 봤던 나로서는 이 영화와 하마구치 감독과의 관련성에 관한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영화가 개봉하자 구로사와 감독 일제 전쟁범죄금기에 도전하다”, “관객 반응 궁금스파이의 아내과거사를 담다”, “일본 전쟁범죄 고발 영화가 던진 묵직한 질문, 영화<스파이의 아내>1940년대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731부대의 생체실험 등의 일본이 전쟁시기에 저지른 온갖 만행과 일제의 전쟁 범죄를 소재로 다뤘다는 점에서 화제가 됐으며 이를 계기로 이러한 반성의 영화들이 일본에서 더 나와주기를 바란다는 기사들이 대거 등장했다.

원래 이 작품은 20206월 일본 NHK에서 8K로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 스크린 크기와 색조를 영화의 형식에 맞게 새롭게 구도화하여 재제작된 작품이다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베에서 무역회사를 운영 중인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와 그의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는 외제품을 즐기고 취미로 9.5mm 필름으로 영상촬영도 하면서 서양식 생활을 영위하며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어느 날 유사쿠는 조카인 후미오(반도 료타)와 함께 한 달간 만주를 다녀온다며 떠난 유사쿠는 예정보다 늦게 돌아오고 이후 사토코의 어릴 적 지인인 헌병대 분대장 다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사토코를 헌병대로 불러 히로코라는 여자가 죽었는데 그 여자를 만주에서 데리고 온 사람이 유사쿠라는 말을 전한다.

히로코와 유사쿠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 사토코는 유사쿠에게 히로코에 대해 묻는다.

유사쿠는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부대가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목격하고 이를 자신의 9.5mm 필름 안에 담아온 것과 히로코를 시체 더미에서 구해준 댓가로 부대의 생체실험이 적힌 노트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유사쿠는 자신은 코스모폴리탄이라며 일본 국가에 충성하기보다 세계 정의 실현을 위해 이를 세상에 알리려 미국에 간다고 한다. 사토코는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다 죽을 수도 있다며 그를 설득하지만 소용없다.

사토코는 결국 유사쿠를 도와 스파이의 아내로 유사쿠와 운명을 함께 할 것을 다짐한다. 둘은 미국으로 망명을 준비하고 둘은 각자 따로 출발했다가 미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몰래 몸을 실은 사토코는 누군가의 신고로 인해 발각되고 헌병대로 끌려간 사토코는 필름 안에 든 관동군의 만행을 헌병대 앞에서 보여주지만 그 필름에는 그들이 찍은 스파이 영화뿐 그 영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사쿠는 혼자 떠나고 사토코는 정신병원에 수감되고 1945년 일본은 패전을 맞는다.

영화를 제작하기 전, 구로사와 감독이 재직 중인 도쿄 예술대학 대학원의 제자인 노하라가 구로사와에게 고베를 무대로 한 8K 카메라를 사용해 NHK드라마를 만들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예부터 뤼미에르 형제의 촬영 기사인 콩스타 기렐이 최초로 도착한 장소이며 에디슨의 키네마스코프가 처음으로 일본에서 공개된 장소로 여러모로 영화의 역사와 관계가 깊은 도시인 고베는 구로사와 감독의 고향이다.

노하라와 함께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된 하마구치 감독은 스승인 구로사와 감독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어떻게든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구로사와 감독이 이전에 계획했던 영화 <1905>를 떠올렸다.

이 영화는 1905년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로 비록 제작은 되지 못했지만 구로사와 감독이 역사, 시대물에 관심 있음을 반추하는 작품이다. 이로 인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그리 늦은 과거가 아닌 1940년대로 설정하고 시나리오를 집필, 구로사와 감독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으며 구로사와 감독은 하마구치와 노하라의 시나리오 집필 중반부부터 시나리오에 참여했다.

그러나 구로사와 감독은 시대성도 그러하지만 특히 시나리오에서 부부가 서로가 서로를 속이려 하는 지점, 이러한 관계성의 발상이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스파이의 아내' 스틸 컷​
​'스파이의 아내' 스틸 컷​

<스파이의 아내>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서스펜스 멜로, 구로사와 감독도 언급한 부부간의 묘한 서스펜스에 관해 혹자는 히치콕을 연상시킨다고 하지만 이 영화는 히치콕과는 다른, 일본만이 가진 독특한 서스펜스를 추구한다.

이는 바로 일본의 추리소설의 거장 마쓰모토 세이초식 서스팬스그것과 닮아있다.

1950
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였던 세이초는 여러 작품에서 남편과 아내, 또는 남녀의 서로 속고 속이는 애증 관계 속에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그 안에서 결국 과거의 비밀이 드러나거나 살인 사건의 실마리가 해결되는 식의 추리소설의 구도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는 세이초 원작 영화에서, 보다 뚜렷이 나타나는데 야마다 요지가 각본을 쓴 <제로의 초점> 또는 <점과 선>에서 <스파이의 아내>에서와 유사한 부부간의 미묘한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다.

<스파이의 아내>는 저예산으로 만들어졌기에 이 작품을 찍기 직전 드라마인 NHK대하드라마 <이다텐~도쿄올림픽 이야기>의 세트장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영화의 배경이 고베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문제로 인해 이바라기현이나 군마현을 고베와 흡사하게 꾸며 촬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저예산으로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륜에서 묻어나는 구로사와 감독의 연출력은 영화의 첫 시퀀스인 사무실 안에서의 동선 등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구축되는 탁월한 구도는 역시 구로사와 감독이기에 할 수 있는 카메라 기법이며 거기에 자연적인 태양 빛을 이용해 영화의 미장센을 더욱 극대화하여 영화를 한층 더 고급스럽게 만들어냈다.

영화는 이렇게 구로사와 감독의 손을 거쳐 클래식하고 빛과 어둠을 잘 이용한 양식적인 리듬 연출에 의해 완성되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내러티브 안 여기저기서 하마구치 감독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영화 안의 두 개의 예술과 그리고 사토코로 대변되는 여성 캐릭터에서 말이다.

하마구치 감독은 자신의 작품 안에 음악, 문학, 연극 등 다양한 예술 분야를 꼭 투영한다.

예를 들어 <친밀함>에서는 연극을, <해피아워>에서는 음악과 소설을, <우연과 상상>에서 소설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연극을, 이처럼 영화 안에 다른 장르의 예술을 끌어들여 영화 속 또 다른 예술의 세계로 관객을 빠져들게 하고 그 안에서 갈등의 실마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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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아내>에서는 9.5mm 필름 영화의 세계로 관객을 끌어들인다. 너무나도 생소한 9.5mm 필름 속 무성영화에 빠져드는 찰나, 우리는 그 필름 안에 들어있는 참담한 역사의 실체와 맞닥뜨리게 된다.

하마구치는 각본 속에서는 짧게 언급됐던 생체실험 부분을 영상으로 대면했을 때 무서움을 느꼈다고 했다. (9.5mm 필름 속 기록영화나 영화 속 유사쿠가 찍은 영상들은 모두 디지털로 촬영하고 나중에 필름룩 처리를 한 것이라고 한다.)

​'스파이의 아내' 스틸 컷​
​'스파이의 아내' 스틸 컷​

하마구치 감독의 작품은 여성 캐릭터를 빼고서는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모든 작품에 여성이 등장하며 그 여성은 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주된 장본인이며 작품 안에서 가장 역동적이며 생명력 있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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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아내> 역시도 사토코는 확실히 하마구치 감독이 탄생시킨 캐릭터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행동하고, 그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도리와 이치를 파괴해도 상관없다.

사랑하는 유사쿠의 곁에만 있으면 된다는 그녀는 조카는 밀고하더라도 유사쿠만 안전하면 되는, 대의(세상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를 위해 미국 망명을 선택한 유사쿠와는 달리 유사쿠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대의가 됐던 그 무엇이 됐던 다 할 수 있는 그녀다.

그렇지만 그녀는 유사쿠에게 민폐를 끼치는 캐릭터는 결코 아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며 그 누구보다도 계획적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스파이의 아내' 스틸 컷​
​'스파이의 아내' 스틸 컷​

하마구치 감독은 사토코의 캐릭터에 관해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작품에 대한 무한 애정을 여실히 드러낸 것 같다고 밝혔다.

마스무라 감독은 6, 70년대 활발히 활동한 감독으로 이탈리아에서 영화 공부를 한 덕에 서구 영화의 영향을 받아 일본영화의 전통을 거부하며 파격적인 소재와 혁신적인 스타일을 추구한 전후 세대의 대표주자이다.

그는 작품에는 강렬한 욕망을 지닌 아름답고 위험한 여성 캐릭터를 자주 등장시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마스무라 영화 속 여성 캐릭터를 레퍼런스 하여 탄생한 캐릭터가 바로 사토코이다.

영화 <스파이의 아내>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는 거시적인 영화 같지만, 실은 인간의 내면을 다루려 노력한 미시적인 영화이다.

구로사와 감독은 전쟁 범죄를 소재로 한 것에 대해 엄청난 각오나 용기를 필요한 건 아니였으며 그렇게 의식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에 반하지 않게 담으려 했다. 크게 의식을 했던 부분은 아니다.

한편 역사를 그리면서도 엔터테인먼트여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다.

시대적 배경을 배치하면서 서스펜스나 멜로드라마로 성립될 수 있게 할까 싶었다.”고 말한다.

그 때문일까. 정확한 재현이란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일본 헌병대의 복장은 블루톤으로 나치에 가깝게 하여 리얼리티를 떠나 하나의 파시즘적 상징으로 세계 공통의 이미지로 사용했으며 헌병의 머리도 40년대 당시와 같은 빡빡머리가 아닌 자연스럽게 짧은 73 가르마를 선택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일본인만 눈치챌 수 있는 시대적 모호성을 보여주며 각본에는 없는 영화의 엔딩을 새롭게 재창조해 낸다. 여기저기서 포탄이 터지는 해변에서 오열하는 사토코, 종전선언, 그리고 유사쿠의 위조된 사망 보고서, 몇 년 후 미국으로 떠나는 사토코, 이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라는데 정녕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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