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복 영화감독의 시평]
"제대로 단련된 강철 시... 분노 좌절을 반어적인 '슬픈 희롱'으로 승화"
"적을 굴복시키는 시인의 자기만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방식이 부럽다"
"개인 서사를 산맥처럼 우람하고 바다처럼 광대하고 강물처럼 유장함"

영화 시나리오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작업을 마치고 인편으로 받은 조성국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귀 기울여 들어줘서 고맙다’를 읽는다.

시 읽기에 딱 좋은 날씨다. 한 때 시문학에 심취해 배회하던 시절 추억만으로 감히 조 시인의 금과옥조 같은 시를 가름할 능력은 없다.

그냥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감정으로 영화 속에 조 시인의 정서를 담아보려 한다.

조성국 시인.
조성국 시인.

한번은 단숨에 읽는다. 본래 시 읽는 습관은, 앞뒤 순서 없이 읽기도 하고 내 감정이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에는 잠시 접어두었다가 다시 찾아 읽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조성국 시인의 시는 그 습관과 달리 오프닝부터 쭉 달린다. 

그건 아마도 시나리오 습작이 몸에 익은 탓과 더불어 영화를 관람하는 나만의 취향일 수도 있다.

나는 음악, 미술, 문학을 접하는 데 있어 캐릭터 일관성을 우선으로 고민하고 찾는다. 조 시인의 시에서도 가장 먼저 캐릭터에 꽂혔고 캐릭터가 끌어가는 즐겁고 유쾌한 이야기에 빠졌다.
 

■ ‘슬픈 희롱’의 느낌이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나는 시집 ‘귀 기울여 들어줘서 고맙다’를 한 마디로 ‘슬픈 희롱’으로 정리했다. 즐거움과 유쾌함이란 역설적 표현이거나 때론 반어적 감정의 표현이다. 

조 시인의 삶의 궤적은 일반 사람들이 보낸 청춘의 삶과는 사뭇 다른 수배, 구속, 감시라는 테두리 안에서 길어낸 뼈아픈 시편들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그의 시들은 1980년 5월 이전의 삶과 의식마저도 80년 5월 정신에 삽입시켜 성공적인 시적 깊이와 사유를 완성해 냈다고 생각된다. 

그의 시간 빛나고 삶이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분노와 좌절과 절망을 시를 통해 극복해냈다는 점이다.

아픈 과거를, 견디기 힘든 날들이 더 많았을 시간을, 저주하고 싶은 가해자들이 꿈에서도 보였을 두렵고 원통했을 분노와 원망들을 조 시인은 남의 이야기 손아귀에 넣고 자기식으로 가지고 논다. 희롱한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 단련과 성숙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만들어 낼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제대로 단련된 강철 시다. 
 

■ 감춰진 복수가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조성국 시인의 시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화자인 나는 벌여놓은 판 속에 구경꾼으로 들어가 미주알고주알 푸념을 늘어놓으면서 할 말은 다 하고 있다.

시인은 쉽게 결말을 내리지 않고 감춰 둔 채 벌여놓은 판의 연희 속에 이미 다 복선과 반전을 깔아놓아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반전과 결말은 시와 영화 시나리오가 갖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시인과 영화감독은 '독자와 관객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가?'에 귀결되기 때문이다. 

조성국 시인이 최근 네 번째 시집으로 펴낸 '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 표지 그림. ⓒ문학들 제공
조성국 시인이 최근 네 번째 시집으로 펴낸 '귀 기울여 들어 줘서 고맙다' 표지 그림. ⓒ문학들 제공

조 시인이 통쾌하게 내뱉은 <어떤 문상> 시에서 나는 아름다운 복수를 보았다. 

시인을 담당한 거머리 같은 형사가 손님으로 가장해 직장까지 찾아와 방해하고 심지어 결혼식 하객으로 찾아와 겁을 줄 정도라면, 공포영화에 가깝다.

그런데도 시인은 그 형사와 식사를 같이하고 형사의 부음 소식에 문상을 다녀온 장면에서는 시인의 복수에 대한 내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통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이고 결말이다. 영화로 치자면 화려한 액션, 날카로운 무기. 피 철철 흐르는 장면을 상상했을 것인데, 장례식 문상 다녀온 한 줄로 정리해 버린다.

한 편의 시를 통해 세상을 보는 시인의 넓고 깊은 시야를 느낀다. 삶의 뼈아픈 성찰 없이는, 세상을 바라보는 독한 고민 없이는 쉽게 생성될 수 없는 내공이다.

시집을 읽는 내내 수정 작업을 마친 영화 시나리오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의 잔상과 겹쳐지는 어떤 기시감 같은 부분도 있다.

같은 시대 배경과 상황 때문이리라. 시나리오 줄거리는 1980년 5월 피해자와 가해자의 악연이 43년이 흐른 현재 역할이 바뀐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나는 잔혹한 복수극이다.

복수를 두고 조 시인과 내가 다른 점은 적을 바라보는 인식이다. 조 시인은 비록 적이지만 사람의 기준에서 보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나는 적을 가축으로 설정해 당한 만큼 물리적 복수를 한다. 중세 고문 도구와 방법을 총동원하고 수간으로까지 이어지는 고문 지옥을 보여주는 것만이 내 나름의 역사를 대하는 인식이다. 

폭력을 쓰지도 않고 피를 흘리지도 않으면서 적을 굴복시키는 조성국 시인의 자기만의 친절하고 아름다운 방식이 부럽다.

나는 시를 해석하고 폭넓게 이해하는 능력은 되지 못한다, 오직 내가 작업하는 영화에 빗대 시를 이해하고 접목해서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말해볼 뿐이다. 

■ 영화가 지닌 몇 가지 특성이 시의 형태와 구조와 작업 방식이 유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시가 되기 위한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시나리오 또한 이야기 구조를 갖추기 위한 몇 가지 조건들이 있다.

인물, 성격, 지문, 구성, 대사, 배경 등 나는 시가 됐든 시나리오가 됐든 인간관계가 됐든 이미지 형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쉽게 말해 척 보면 모양이 그려지는 그런 시들을 좋아한다.

시를 읽는 독자가 문자를 통해 이미지화로 연결된다는 것은 시인의 대단한 능력이고 재능이다. 조성국 시인의 시편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는 등장인물, 배경, 시간, 대사, 일관성, 공간, 소품 등 시나리오 그림 대본 같은  느낌을 받는다. 

박기복 영화감독(시인).
박기복 영화감독(시인).

나는 시를 읽는 내내 지금은 세상에 없는 부모님과 동네 사람들과 내 살던 옛집에 머물다 왔다. 잊고 지냈던 주옥같은 말씀들이 시에서 녹음이 재생된 착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옛것도 아닌 언어가 옛것이 되어버린 나의 언어를 시인은 까먹지 않고 시에 녹아내 주어 고맙다.

고향 집 똥오줌으로 키운 갓 냄새가 났다가, 과붓집 여인네가 건넨 막걸리에 취해 일당 다 퍼주고 빈손으로 새벽녘에 귀가한 아버지의 푹 삭은 입 냄새도 난다.

그의 시어는 단순히 옛것이 아닌, 개인 서사에 촘촘하게 직조해 산맥처럼 우람하고 때론 바다처럼 광대하고 강물처럼 유장하게 흐르게 한다.

일상의 소소한 소묘나 자잘한 사건을 아주 크게 그려내는 깊이를 본다. 특히 <정령> <도끼질> <장수하늘소> <당산나무> 등.

특히 <옛집에 들다>는 카메라를 들이대 롱테이크 촬영을 하고 싶은 충동마저 든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시 흐름은 삶의 질곡이 물씬 풍기는가 하면, 명창 임방울의 호남가 절창을 듣는 듯하다.

조성국 시인의 다음 시를 기대하게 된다.


** 박기복 영화감독(시인)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광주진흥고,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졸업. 1990년 전남대학교 오월문학상 시 부문 <애인아 외 1편> 우수작 당선, 1991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희곡 <추억의 산 그림자> 당선.
현재 영화제작사 (주)무당벌레 필름 대표. 영화 <낙화잔향-꽃은 져도 향기는 남는다>(2019) 작가/감독,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 작가 겸 감독을 맡았다.
전자우편: kibo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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