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 생명의 무늬

예술의 거리, 꾸꿈스러운 공간에 짚단이 세워져 있다. 지하를 향하는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햇볕에 잘 발효된 어머니의 된장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익숙한 우리 냄새, 가을 들판에서 익숙하게 맡아지던 냄새. 그러나 어느 순간,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꾸꿈스런 냄새. 지푸라기라고 불리는 짚단 냄새.

공간을 떠받친 벽은 물론이고 천장과 바닥까지 짚풀이 점령했다. 각각의 이름을 달고 형상을 달리한 채 지푸라기이면서 지푸라기가 아니다. 하나의 존재, 작가의 손을 통과해 개체가 되었다. 군고구마를 먹으며 오래전, 어느 시골의 사랑방에 앉아 옛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다. 안식과 평화를 주는 지푸라기가 말을 걸어온다.

지푸라기 속에 길이 있었다.

김호순 작가. ⓒ범현이
김호순 작가. ⓒ범현이

30년이 넘었다. 짚과 같이 울고 웃으며 살았다. 짚 속에서 밥을 먹고 짚과 함께 성장했다. 1990년대 초 우리의 손맛이 묻어있는 짚풀공예 작품을 처음 만들던 때를 기억한다. 머리로 구상하고 손을 통과해 마침내 작품으로 완성되었을 때, 거칠어진 손보다 더 거칠고 힘차게 가슴이 뛰었다.

지푸라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가볍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치부해왔다. 얼마나 쓸데가 없으면 이런 속담이 생겼을까 할 정도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버릴 것 하나 없이 ‘쓸모’ 있는 절대적 존재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민족은 농경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논에 물을 대고 쟁기질로 빛나는 봄을 맞았다. 벼는 볍씨를 뿌리면서 발아를 시작으로 알곡을 내어주며 생명을 살렸다. 나락으로 베어지고 볏 짚단이 되어서 논 한쪽이나 뒷마당 가에 집적되면서 용도는 더 다양해졌다.

김호순 작품. ⓒ범현이
김호순 작품. ⓒ범현이

긴 긴 겨울밤, 사랑방에서는 다음 해의 농사와 생활을 위해 갖가지 도구와 편리를 위한 용품이 짚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알곡을 가두어 둘 가마니를 짜고, 각종 물건을 묶을 밧줄을 만들어냈고, 각종 농산물의 건조를 위해 덕석을 만들고, 나물바구니, 계란주머니, 밥 바구니 등 일상에 필요한 대부분이 새해의 희망과 덕담으로 엮어져 짚풀공예로 거듭났다.

작가는 “처음 지푸라기를 만졌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 기억이 현재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수확이 끝난 들판과 뒷마당에 짚더미가 쌓인 것을 바라볼 때마다 무엇을 만들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뛰었다”며 “하지만 현재는 짚단을 보는 것이 녹록하지 않다. 주변의 짚풀공예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 자연농법으로 재배한 짚더미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짚풀공예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탄식했다.

짚풀공예는 또 다른 나의 영혼

김호순 작품. ⓒ범현이
김호순 작품. ⓒ범현이
김호순 작품. ⓒ범현이
김호순 작품. ⓒ범현이
김호순 작품. ⓒ범현이 

농약을 자주 친 나락의 지푸라기는 푸석해서 짚풀공예를 할 수 없다. 트랙터로 자동 수확한 짚풀 역시 보통의 지푸라기보다 길이가 짧아서 공예품을 만들 수 없다. 자연농법으로 수확한 나락의 지푸라기여야 공예품을 만들 수 있다.

작가는 “신기하다. 우리 선조들이 만들어 사용했던 것을 재료부터 옛것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디자인과 사용의 유용성은 내 구상과 손으로 재구성할 수 있지만, 재료만큼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고 설명한다.

농경사회의 뿌리찾기에 주력했다. 살아온 생애의 절반이 꼭 이어나가야 할 짚풀공예의 자산을 찾아 나섰고, 우리 문화의 유구한 유산을 후손들의 교육자산에 유용하도록 짚풀공예의 제작 기법과 체험에 대한 교재도 개발 저술했다.

작가는 “일본 아오모리도자기 축제를 잊지 못한다. 우리나라 짚풀관을 독자적으로 제공받고 우리는 그곳에서 일주일 동안 우리 전통 짚풀 공예품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만들었던 공예품을 기증했을 때 일본인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짚풀로 움집을 지었을 때 우리를 바라보던 일본인들의 눈빛이 지금도 생각난다”고 말했다.

김호순 작품. ⓒ범현이
김호순 작품. ⓒ범현이
김호순 작품. ⓒ범현이
김호순 작품. ⓒ범현이

먼 길을 걸어왔다. 어쩌면 작가의 몸은 짚풀로 만든 인형처럼 지푸라기로 환원되었을 지도 모른다. 농경사회의 최대 산물이던 지푸라기가 작가에 이르러 새로운 생명을 가진 짚풀공예로 거듭났고, 전통에 기반한 현대적 기법과 용도로 재구성되었다.

나락으로 생명을 살게 하고 마른 짚더미로 도구와 생활용품으로 재탄생 되었으며 마침내 제 몸을 태워 생명을 데워주는 역할까지. 지푸라기야말로 꼭 잡아야 할 쓸모있는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 작가의 DNA가 정확하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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