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사 [전문]

고 송기숙 선생님의 영전에

여류소설가 송기숙 여사님, 여류시인 문병란 여사님 귀하

- 전청배 문인 
 

1970년대 후반으로 기억난다. ‘도깨비 잔치’라는 송 교수님의 소설이 월간 ‘현대문학’에 실려 필화사건으로 비화돼고 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어야, 전군. 이것 좀 보소. 내가 여사님이 되아부렀네.”

“워따, 교수님. 믄 이런 일이 있다요. 외국에서는 성전환 수술도 하는 갑습니다. 유신독재에서 남자로서 사는 것보다 아주 이참에 수술이라도 해서 여자로 삽시다.”

“오방 최홍종 선생처럼 붕알을 까부란 말인가?”

“사나이로 사는 것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내가 먼저 까불라요.”

“이 사람아, 자네는 아직 어린디 쓰잘데기 없는 말은 하지도 말소. 나는 제사상 차릴 놈도 있응께 내가 까불라네.”

다음 날이었다. 밤새 고민하다가 나의 은사님이신 문병란 선생님을 찾아갔다.

“교수님, 어저께 송기숙 선생님을 만난는디, 어느 잡지사에서 송기숙 여사님이라고 원고 청탁이 왔답디다.”

“어야, 나도 그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이 왔네. 그란디 문병란 여사님이라고 왔드만.”

“워메, 그랬서라우.”

“내가 확인해본께, 그 잡지사 수습기자한테 원고 청탁을 하라고 시겼는디, 우리 이름이 기숙이고 병란인께 여자로 알고 했능갑데. 내가 그래서 여류시인처럼 시를 써서 보내부렀네.”
 


新 봄날은 간다

문병란

잠뱅이 바지에 봄바람이 휘날리더라

오늘도 바지끈 묶어 매고

짭새들 넘나드는 충장로 길을

꽃이 피면 교도소로

꽃이 지면 법원으로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마포바지에 풋방귀가 풀풀 새드라

오늘도 마늘쫑 입에 물고

선술집 대폿잔에 분필 가루를

꽃이 피면 취해 울고

꽃이 지면 밥벌이에

서러운 가장 신세 봄날은 간다.

 

막걸리 사발을 앞에 두고 나의 은사는 끝내 엉엉 울었다. 나는 문병란 시인의 노래 실력과 입담을 건성으로 흘리지 않고 즉석에서 메모를 하여 송기숙 선생님께 드렸다.

“어야, 문시인은 천상 시인이시네. 나는 국립대학 교수란 것이 부끄럽네. 내 대신 남주하고 이강이란 우리 대학 제자들이 박정희란 놈의 유신을 아작내다가 시방 교도소에 있는디, 요놈들한테 영치금이라도 보내야 쓰겄네.”

영치금을 보내고 나서 얼마 후에 ‘교육지표’ 사건이 터졌을 것이다. 다산연구가 박석무의 ‘다사록행(茶思錄行)’이 실천된 순간이었다.

“생각은 다산 정약용처럼, 행동은 녹구장군 전봉준처럼”

송선생님은 언제나 나를 녹두장군의 후예로 대접해 주셨다.

“전군, 자네를 보믄 녹두장군의 기개가 느껴진단 말이시.”

짜잔한 나를, 마치 녹두장군을 대하듯이 대접해 주신 소설 ‘녹두장군’과 ‘암태도’의 아아! 나의 문학적 사표이신 송기숙 교수님의 영전에 녹두장군의 후예 천안 전씨 문중을 대신하여 삼가 졸고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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