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기 시작한 이른 새벽, 시장통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연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시장통을 오복이 어정쩡한 걸음으로 빠져나오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걸음이 이상하다.

큰딸의 상견례 날, “꼴사납게 굴어봐 내가 상 엎는다, 두고 봐. 내가 하나 안하나” 사돈네가 딸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말에 으름장을 놓는 엄마 오복, 그렇지만 상견례가 시작되자 사돈 눈치 보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 시장에서 자신은 먹지도 않는 생선을 팔면서 딸 셋을 키운 오복. 경비 일을 하는 남편은 딸의 결혼 따위엔 관심도 없다.

못 배우고 못 먹고, 그럼에도 자식들은 다 대학을 보냈다는 자부심에 산다. 상견례가 끝난 후 다시 찾은 시장통에선 재개발 문제로 모인 집회 후 술자리가 한창이었고 딸의 결혼 축하 인사를 받으며 늦게까지 계속된 술자리 그날 밤, 오복은 누님 동생 하던 동료 상인 기택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단편영화 시절부터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폭력에 지속적인 관심과 집요한 문제 제기를 해왔던 김미조 감독의 첫 장편영화 <갈매기>는 지난해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받았으며 제68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제28회 함부르크영화제, 제36회 바르샤바국제영화제, 제57회 대만 금마장영화제 등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와 언론과 평단, 관객 모두에게 주목을 받으며 지난 7월 개봉했다.

장편영화임에도 불구하고 75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다소 짧을 수도 있지만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현실감 있는 연출력으로 인해 관객을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은 대단하다.

영화 <갈매기>는 주인공 오복을 통해 보편적인 우리네 어머니의 이야기에서 어느덧 한 여성의 피맺힌 투쟁의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서서히 끌어들인다. 상견례 자리에서 딸 가진 어미로써 사돈집 눈치를 보지만 시장의 동료들에게 공무원인 사위 자랑을 하며 연신 즐거워하는 오복, 몸이 아파 누워있다가도 막내딸의 반찬 찾는 소리에 일어나 밥 차려주는 오복의 모습은 여느 집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엄마! 나는 못 배웠어도 우리 딸들은 다 공부시켜서 대학까정 보냈다. 엄마, 나도 학교 가고싶었는디 나는 왜 안보내줬어? 더 잘 살고 싶었는디 나는 왜 안보냈줬어? 잉 엄마? 내가 배웠음 뭐라도 했을틴디, 세상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오복은 큰딸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고백한 날, 우연히 학교 교정에 들어가 치매인 자신의 엄마에게서 온 전화에 대고 푸념인지 분노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말들을 쏟아 낸다. ‘나는 무식해서, 못 배워서, 그러니 너네들은 그리 살지 말아야지.’ 자식으로 태어나 특히 딸자식으로 태어나 엄마에게 이런 말 안들어 본 사람이 있을까?

영화 <갈매기>는 자식들만을 위해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을 오복을 통해 리얼하게 재현한다. 그렇기에 오복이 당한 그 날이 더 안타깝고, 더 절절하고 더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는 여성의 성폭력 사건을 다룬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자극적이지 않다. 술자리 그리고 찰나의 암전, 새벽녘 어정쩡한 걸음으로 시장통을 빠져나와 지하철 계단을 오르는 오복, 한 행인의 “아줌마, 뒤에 피.”라고 하는 씬에서 그날 오복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음을 추측하게만 할 뿐이다.

“성폭력 희생자도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피해자들이 영화를 보면서 당시의 기억을 재생 당해야 하는 끔찍한 제2차 가해가 일어나지 않았음하는 감독의 윤리적 도의에서 나온 사려 깊은 연출력이라 할 수 있다.

집이 아닌 대중목욕탕에서 혈흔이 묻은 속옷을 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는 것은 대중목욕탕이라는 그 공간의 심상(心象)이 중노년 여성에게 어떠한 심경(心境)으로 다가오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감독은 여성 감독이기에 가질 수 있는 섬세하고 디테일함을 씬씬마다 잃지 않는다.

영화는 철저히 성폭력 피해자인 오복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때로는 억척같이 살아온 그녀의 삶처럼 시장통에서 같은 동료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기도 하지만, 가족을 위해 소심하고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60대 여성이 자신의 생(生)을 위해 주체적인 여성으로 탈바꿈해 가는 모습은 현실적이면서 섬세하다.

그렇기에 가해자에 대한 전사(全史) 따위는 불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술자리에서 뒤돌아 소변을 보고 있는 기택의 뒷모습을 노출시키며 한국 사회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행해온 암묵적인 폭력과 무례함을 전경화시킨다.

그리고 기택이 자연산 전복이랍시며 박스 하나를 던져주고 간 그날, 오복은 변화한다. 늦은 밤, 기택의 가게 앞에서 노상 방뇨를 하고 돌을 던지는 너무나도 소소한 복수이지만 그녀가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다음날 시장통으로 향하는 그녀의 표정은 뭔지 모를 결의에 차 있고 걸음걸이는 당차다. 이날 이후 경제적인 생활 터전이었던 시장과 복작대지만 끈끈한 혈연의 집이라는 공간은 오복에겐 하나의 투쟁의 공간으로 전복된다.

그래도 오복 곁에는 그 투쟁의 길을 함께해주는 두 딸이 있다(둘째 딸은 결혼해서 함께 살지 않는다). 딸들과 엄마의 연대는 시장이나 집이라는 공간이 아닌 불편하고 위험에 노출된 아슬아슬한 길에서 이루어진다.

도로에서 쭈그리고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 딸들, 엄마와 언니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던 막내딸도 처음으로 언니의 결혼 준비에 관해 묻고 고생이 많다고 전하며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곳은 바로 길바닥이다. 위태롭고 불안해 보이는 그 길 위에 그녀들은 서 있는 것이다.

“기택이 새끼한테서 사과 좀 받아다 주세요. 무슨 일인지는 그 새끼가 더 잘 알거예요” 오복은 단지 기택의 사과만을 받고 싶었을 뿐이었지만 돌아오는 시선과 비난은 오복이 감내하기에 그리 녹녹치 않다. 시장 동료들과 그리고 가족들은 오복의 상처보다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얽혀 각자의 이익만을 위해 그녀를 회유하다 외면한다.

대의(재개발 보상금 문제)를 위해 개인(오복)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회(동료들), 이러한 비난은 이제 오복에겐 싸워야만 하는 이유로 작용하고 하나의 동력이 된다.

“술이 왠수지, 오복이가 술을 너무 좋아해.”, “그래도 신고까지 한 건 너무 한 거 아냐?”“우리끼리 하는 말로 한강에 배 한번 지나간 걸 가지고 뭘 그래. 그리고 똥 밟았다 생각해. 아니 젊은 사람 발목 잡아서 좋을게 뭐가 있어”, “성폭행이라는 것이 여자가 응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되는 것인디.” 이러한 영화 속 대사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성폭행 피해자들에 대한 그릇된 망탈리테(mentalites, 心性史)를 과감히 꼬집는다.

우연히 올려다본 옥상에 한 남자가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개나 소나 억울하다는 “권리 타령”이라 할 뿐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타령, 억울함을 호소하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단지 타령이 돼 버린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큰딸의 결혼식 날, 오복의 하혈이 멈췄다. 어느새 영화는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하혈이 없음은 그날의 트라우마도 하나의 생채기로 전락하는가 하며 여타의 성폭력 영화들처럼 부실 수 없는 장벽에 가로막혀 오복의 투쟁도 여기서 끝인가 보다고 생각하려는 찰나, 오복의 투쟁이 끝이 아닌 시작임을 영화는 ‘생존권 확보’ ‘단결 투쟁’을 다시 한번 반증한다.

“어제도 용역 놈들이 저희집 수저를 깨드리고 갔습니다. 법 앞의 평등은 가진 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존권을 짓밟고 우리의 인권을 말살하려는 우리가 그냥 넘어가서는..” 60이라는 나이에 그 누군가의 폭력으로 인해 망가져 버린 오복의 삶이 증인도, 증거도 없다는 이유로 법으로 처벌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리대를 찬 오복의 귀에 들리는 기택의 집회 연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의 생존권을 짓밟고 ‘나’의 인권을 짓밟는, ‘너희들’을 향한 ‘나’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투쟁!

영화의 엔딩씬에서 흘러나오는 전자오르간의 촌스런 멜로디가 오늘따라 비장하게 들린다.

“저는 주오복입니다. 수산시장에서 삼십년 넘께...”

배운거 없는 한낮 힘없고 나이 많은 여자이지만, 그녀만의 방식으로 ‘나’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고귀하고도 존엄한 오복의 투쟁에 간절히 응원하며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다 보면서 나는 언제 챙겨?” 이제는 엄마도, 아내도, 동료도 아닌 나 주오복으로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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