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몸매가 처녀처럼 늘씬하시네’, ‘할머니 같지 않게 옷을 잘입으시네요’ 영화 속의 이 대사들은 많은 사람들이 호의를 담아 효정(예수정)에게 건네는 칭찬의 말이다. 이 말은 칭찬일까? 비난일까?

아마도 우리는 이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효정이 수영으로 가꾼 날렵한 몸매와 시쳇말로 소위 ‘센스있는’ 그녀의 옷차림은 그녀의 모습이 노인답지 않기에 칭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69세의 할머니에게 보내는 선의(善意)의 언어에는 사실 그녀가 노인답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세상의 편견이 가득 담겨 있는 불의(不意)가 호의로 은폐되어 있다. 

  세상이 생각하는 노인의 모습은 후줄근한 옷차림에 힘없는 육신을 가진 죽어가는 신체이다. 따라서 노인은 죽은 신체이기에 함부로 말해도 되는 ‘대상’이라는 것이 세상의 관점이다. 효정의 몸과 옷차림은 살아있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처럼 행동하길 원하는 세상의 무심한 폭력을 방어하기 위한 일종의 갑옷과도 같다.

죽어가길 요구하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기 위해, 그녀는 원하지도 않는 방어구를 몸에 걸머진 셈이다. 사람들은 이런 효정의 사정을 알지도 못한 채 그녀의 갑옷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의 무심한 칭찬은 선의의 탈을 쓰고 너무도 쉽게 그녀의 마음에 생채기를 만들어 낸다.

  <69세>는 성폭행 피해자인 노인 여성이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영화는 피해자인 효정과 그녀를 돕는 동인(기주봉)이라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아간다. 세상은 29세의 젊은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하는 효정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젊은 남자가 할머니를?’ 사건에서 아무런 개연성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동인은 효정의 진실을 밝히려는 유일한 선의의 조력자이다. 동인은 아내의 기일마저 잊어버린 채 효정의 일을 돕지만, 그러한 동인의 행동조차 효정에게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효정을 믿는 그에게 조차 무기력하길 원하는 피해자에 대한 세상의 편견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동인이 가진 피해자에 대한 세상의 편견은 그가 효정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는 장면으로 처음으로 나타난다. 동인은 효정이 성폭행 피해를 당하면서 생긴 팔목의 상처를 보고 분노하며 그녀의 팔을 함부로 낚아챈다. 상처입은 팔목을 잡고 분개하는 동인에게 효정의 입장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의 진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효정은 무기력한 신체이기 때문에 그녀는 동인에게 조차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대상이다. 오히려 동인은 무기력한 사람들 돕는 선의의 조력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그의 모든 행동은 선의로서 정당화 된다. 

  하지만 그러한 호의에 과연 효정을 위한 것이었을까? 동인의 선의는 사실은 자신을 향한 호의였기에 효정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긴 것이다. 왜냐하면 동인은 사실은 효정에 대해서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효정이 어째서 자신을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르는지에 대해서 동인은 그 이유에 관심이 없다.

그저 동인은 그녀가 자신과 좀 더 가까운 사람이 되길 원할 뿐 효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다. 가해자인 중호(김준경 분)에게 진실을 말하는 대가로 선처해주겠다고 말하는 동인의 말 속에는 효정은 없다. 그저 동인은 자신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효정의 진실을 밝히고 싶었을 뿐이다.

동인에게 효정은 의지가 없는 이미 죽은 사람인 것이다. 결국 효정은 동인을 떠난다. 동인은 효정이 스스로 갑옷을 짊어져야 했던 이유를 알지 못하며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효정은 자신의 갑옷을 짊어진 채 타인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세상과 맞서 싸운다. 그녀가 세상의 무심한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입은 갑옷조차 효정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선의의 폭력이 자신을 아프게 만들지 않도록, 그녀는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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